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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혁명가 칼 마르크스

https://dia-na.tistory.com 2014. 7. 13. 20:40

 

칼 마르크스


그에 대한 입장이 비판적이든 긍정적이든 마르크스를 거치지 않고 20세기 사회, 정치, 경제사상과 사회과학 이론, 그리고 20세기 역사를 거론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문제의 끝이자 결론이라기보다는 문제의 시작이자 발제라고 할 수 있다.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부이고, 착취계급에 대한 생산계급의 투쟁이 낳은 소산이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완수하기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노동하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피 흘리는 파리는 새로운 사회를 가슴에 품은 채, 적들이 바로 문 앞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역사를 창조하려는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노동자의 파리는 코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영광스런 선구자로 영원히 칭송받을 것이다. 그 순교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다.”

 

 

1871년 5월 28일 파리코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함락됐다. 이 날을 전후로 한 주 동안 약 3만에 달하는 코뮌파가 전사하거나 학살당했다. 두 달 전 3월 28일 코뮌 성립 행사가 열렸을 때 코뮌 위원 92명 가운데 17명이 국제노동자협회(인터내셔널) 회원이었다. 같은 날 런던에서 열린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는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에 대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담화문’을 새로 작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5월 30일 ‘담화’를 낭독하고 총평의회가 이를 승인했을 때, 그것은 코뮌을 위한 조사(弔辭)이자 묘비명이나 마찬가지였다. 6월 13일 런던에서 35쪽 분량 영문 팸플릿으로 발행된 이 담화문은 2쇄 3천부가 두 주가 안 되어 매진되었고, 같은 해와 이듬 해에 걸쳐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등으로 번역됐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자의 사회적 노예화를 위해 조직된 공적 폭력이자 계급독재의 도구로 보았다.

 

 

마르크스의 부계와 모계는 여러 세대에 걸쳐 랍비를 배출했지만, 아버지 히르셸 마르크스는 유대교와 유대인 사회를 떠난 계몽주의 성향의 변호사로, 유대인 공직 진출이 금지되자 하인리히로 이름을 바꾸고 온 가족이 기독교 세례를 받게 했으며 트리어 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다. 어머니는 네덜란드계 유대인 앙리에트 프레스부르. (세계적인 기업 필립스의 창업자 제라드 필립스와 안톤 필립스 형제의 대고모.)

 

마르크스는 1835년 17살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관한 한 젊은이의 성찰>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예 같은 도구로 일하기보다 자기 영역에서 독립하고 인류에 봉사할 수 있는 분야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명이라 믿는 직업을 마음먹은 대로 차지할 수 없다.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회적 관계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 본 대학에 입학, 선술집 클럽에 가입해 주당(酒黨)이 되었고 불온사상 혐의를 받는 시인 클럽에서 활동했으며, 패싸움과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1841년 3월까지 재학하는 동안 아버지의 뜻과 달리 법학보다 철학에 몰두했고, 1841년 4월 15일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로 예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절 마르크스는 두문불출하며 읽고 쓰고 생각하는데 전념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철학 중독자가 되어 사회 생활과 단절되는 것을 무던히도 걱정하다가 1838년 5월 세상을 떠났다. 1843년 6월, 마르크스는 누나의 친구로 네 살 연상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고향 트리어의 한 동네 이웃이던 귀족 관료 베스트팔렌 남작의 딸이었다. 예니는 평생 마르크스에 헌신적이었다. 갖은 고생을 하던 시기 남편의 동지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이런 하찮은 고생 때문에 기가 꺾였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내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아요. 내 삶의 버팀목인 사랑하는 남편이 여전히 내 곁에 있으니까요.”

 

 

보수반동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프로이센에서 학계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희박해진 마르크스는 1842년 쾰른의 <라인신문> 주필로 일했지만 이듬해 정간 조치를 당했다. 파리로 이주하여 <독일-프랑스 연보>를 발간했지만 창간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평생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났다. 1845년 프로이센 당국의 책동으로 파리에서 추방당한 마르크스는 브뤼셀로 이주해 엥겔스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1845-46)를 출간하고 <철학의 빈곤>(1847)을 간행했으며, 공산주의자동맹의 의뢰로 <공산당 선언>(1848)을 집필했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경찰 등 구유럽의 모든 열강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집권당으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아보지 않은 반대당이 있는가? (……)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1848년 독일에서 이른바 3월 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쾰른으로 옮겨 1년 간 <신(新)라인신문>을 발간했지만 다시 추방당해 파리로 옮겼고(이후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시민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여기에서도 다시 추방당해 런던으로 이주했다.

 

마르크스가 런던 딘스트리트 소호 28번지에 살던(1850년~1856년) 1853년 경찰 첩자가 기록한 집안 형편은 이러했다. “전부 다 깨지고 해지고 찢어진 것뿐이요, 모든 게 먼지 투성이인데다가 한없이 어질러져 있다.(……) 그래도 마르크스나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다. 손님을 정중하게 맞아들여 담배든 뭐든 있는 대로 정성껏 대접한다. 결국에는 재치가 넘치는 흥미로운 이야기판이 벌어져서 집안의 궁색한 꼴에도 눈감고 불편도 참을 만하게 된다. 실제로 사귀어보면 참 재미있고 신기한 집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르크스는 거칠고 참을성이 없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더 없이 온화하고 자상하다.”


 

 


이 시기 마르크스의 유일한 수입원은 <뉴욕 데일리트리뷴>의 유럽 통신원 원고료였다. 형편이 다소 나아진 것은 1864년 이후 집안 유산과 친구가 남긴 유산을 물려받은 다음부터였다.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에서 경제학, 역사, 정치, 민족학, 인류학 등 광범위한 분야의 책과 자료를 섭렵했다. 읽은 것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노트에 빽빽이 초록(抄錄)해 나갔다. 그 성과가 <정치경제학 비판>(1859)과 <자본론>(1867년 1권 간행. 사후 엥겔스에 의해 유고가 정리되어 1885년 제2권, 1894년 제3권 출간)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력만 소유하고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이렇게 두 계급이 있다. 노동자는 임금을 초과하는 가치를 산출하지만, 노동자가 받는 것은 노동력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 뿐이며,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차지한다. 그런데 한 시대의 생산력 발달은 생산관계(생산과정에서 사람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 소유관계를 포함)와 모순된다. 이 모순이 역사 단계 이행의 동력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러한 모순은 경제공황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일치는 자본가들이 사적으로 소유했던 생산수단을 사회에 귀속시켜 공유함으로써 실현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착취와 계급이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생애 마지막 10년 마르크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지속적인 집필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만년의 마르크스는 러시아에서의 혁명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가능성에 대한 태도는 애매한 편이었지만, <공산당선언> 러시아어 제2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의 혁명이 서방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신호가 된다면, 그리고 양자가 상호보완한다면, 현재 러시아의 토지 공동소유제는 공산주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881년 말 마르크스는 늑막염에 시달리며 병석에 누웠고 아내는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다. 12월 2일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마르크스는 병세가 심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듬해 마르크스는 요양을 다녔지만 병세는 악화되기만 했다. 1883년 2월 마르크스는 폐에 고름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3월 14일 오후 2시30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가정부는 마르크스가 2층 난롯가 의자에서 “반쯤 잠들어 있다”고 말했다. 1, 2분 뒤 그들이 올라갔을 때 마르크스는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3월 17일 11명이 참석한 장례식에서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외딴 구석에 묻혔다. 사회주의 경향 언론들의 다분히 의례적인 찬사 외에는 언론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죽음이었다. 마르크스를 비방했던 <펠멜가제트>만이 “<자본론>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수많은 책들을 낳을 것이며, 사회적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마르크스 평전>(프랜시스 윈 지음, 정영목 옮김, 푸른숲) 인간 마르크스와 만나는 데 매우 좋은 책. 물론 사상 측면도 충분히 포함하고 있다. “그는 진짜 보헤미안 지식인 생활을 하고 있다. 씻고, 단장하고, 내의를 갈아입는 일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종종 며칠씩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할 일 많을 때는 지칠 줄 모르고 밤낮없이 꾸준하게 일을 한다. 그는 일정한 시간에 자고 깨는 법이 없다. 밤새 한숨도 안자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그랬다가 대낮에 옷을 다 입은 채로 소파에 누워 저녁까지 잔다.”

마르크스 평전핀란드 역으로공산당 선언

 

<핀란드 역으로>(에드먼드 윌슨 지음, 유강은 옮김, 이매진) 프랑스 혁명기에서 러시아혁명에 이르는 시기 사회주의 사상, 혁명 사상의 전개 과정이 주요 인물들의 삶과 갈마들며 펼쳐지는 책.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와 현실감 넘치는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어우러진 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공산당 선언: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강유원 지음, 뿌리와 이파리) ‘공산당 선언’의 제1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부분을 자세히 다루면서,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과 어떤 의미를 지니며, 또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안내한다.

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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