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독서

펌)『화려한 군주』만들어진 전통』- ‘국민’과 ‘전통’은 어떻게 만들어

https://dia-na.tistory.com 2011. 1. 28. 01:17

가끔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왕이 있는 나라의 화려한 궁정의식을 보며 놀라워합니다. 만약 한국에도 아직 왕정이 유지되었다면 일본과 영국처럼 궁정문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카시 후지타니 교수의 『화려한 군주』는 일본의 황실문화가 메이지유신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파헤친 연구서입니다. 이 책에서 후지타니 교수는 황실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지배 권력이 어떻게 개개인에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 국민 통합을 이끌어내는지, 더 나아가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이 언제 발동하는지, 내셔널리즘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근대 일본에서 전통이 만들어졌다고 최초로 지적한 사람은 홀 체임벌린이라는 영어권 학자였습니다. 그는 1912년 『새로운 종교의 발명』이라는 논문에서 일본의 천황 숭배가 아주 최근에 발명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홀에 따르면 충성과 애국의 상징인 일본의 종교는 이전에 존재해왔던 여러 생각을 거르고 조합해서 탄생한 작품입니다. 일본의 지배자들은 이러한 종교를 “폐기 처분되었던” 신도(神道)와 결합시킴으로서 일본의 전통으로 복원시켰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종교는 일본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으로 숭상되었고, 일본의 지배 엘리트들의 의도는 성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지배자들의 시도는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의 지배체제가 변화를 겪었던 것에 연유합니다. 막부(幕府)로 불렸던 일본의 오래된 지배체제가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에 밀려 붕괴됩니다. 개혁세력은 도쿄를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도쿄는 막부의 지배 하에서 제대로 수도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근대의 지배 엘리트들은 천황의 순행(巡行)을 계획하면서 도쿄에 대한 대대적인 재정비를 시작합니다.

일본의 지배 엘리트는 도쿄를 국가의 상징과 의례의 중심지로 삼으려는 ‘근대적 발상’을 했습니다. 때마침 1873년 도쿄에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수도를 재건축할 명분이 생기게 됩니다. 지배 엘리트는 수도를 근대화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서구의 도시를 모델로 삼기로 결정하고 서양 건축가를 고용해 수도 재건을 맡기게 됩니다. 새로 설계된 황거(皇居)는 앞에 광장을 설치해 ‘국민’과 천황이 서로를 인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메이지유신 이전과 초기(1870년대 후반)까지 일본의 백성(‘국민’이라는 ‘개념’이 아직 사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백성’이라는 전근대적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들은 천황이 ‘무엇’인지(누구인지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영주가 지배하는 영역을 넘어 중앙정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일본 백성들에게 세계란 자기 지방의 영주가 지배하는 ‘근처 동네’였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국가 통합을 위해 천황이 전국을 순행합니다. 지금까지 영주에 의해 지배되던 지방에 중앙 정
부의 영향력을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를 묘사한 자료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870년대 후반 천황이 메이지유신을 알리고 국민들을 통합하기 위해 전국을 순행할 때에도 백성들은 천황이 신사에 모셔져 있는 신의 한 종류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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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과 왕실, 욱일승천기 - '통합'과 제국주의>

메이지유신과 함께 황실 의례도 만들어지고 국경일도 탄생합니다. 천황이 신의 자손임을 기리는 국경일도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끔 텔레비전에서 접하는 일본 황실의 고풍스러운 결혼식 장면이나 행사 장면은 사실 메이지유신 이후, 그러니까 1870년대 후반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황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 같은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한 뿌리는 불과 130여 년 정도의 역사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홉스봄이 책임 편집한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책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등장합니다. 영국의 왕실의례 역시, 근대 국민 통합 과정에서 다듬어지면서 오늘날과 유사한 형태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영국왕실의 오랜 전통으로 믿어져오던 왕실기념식이 실제로는 1870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 기념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870년대 이전까지는 영국의 왕실의례는 볼품없고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19세기의 첫 70여 년 간 왕실의 권력은 지속적으로 인기가 하락하고 있었으며, 왕가는 국민들에게 외면받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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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과 유니언잭>

그러나 1870년에 거행된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 기념식에서 왕실의 기념식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즉위 50주년 기념행사와 즉위 60주년 기념행사는 이전과 달리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거행됩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영국의 군주는 ‘제국의 아버지’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군주의 지위가 변화하게 된 것은, 즉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남편인 에드워드가 정치를 초월한 민족 전체의 가부장적인 인물”이 된 것은 영국의 사회경제적 현실이 이러한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 “영국은 압도적으로 도시적이고 산업적이며 대중적인 사회로 진입했고, 사상 최초로 계급적 충성과 계급투쟁이 명실상부하게 전국적인 틀 속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 직전 증가한 산업 소요는 영국사회가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으며 점차 가혹해져 간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혼란은 영국사회에 ‘구시대적인 것의 보존’, 즉 “권력은 없지만 존경받는 군주를 영속성과 민족공동체의 통합적인 상징으로서 의도적으로 의식을 통해 드러내는”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앞에서도 지적하지만, 한국은 왕실 자체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왕실의례와 같은 전통이 만들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만드는 과정은 비슷하게 겪어 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박정희 정권 시기, 혹은 전두환 정권 시기에 ‘뜬금없이 발굴’되어 치러진 전통행사들이 아마 한국 내에서 찾을 수 있는 유사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 당시 이순신 같은 민족의 영웅을 발굴해 만들어내는 과정 역시,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의 발굴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