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독서

펌)몸(!)으로 공부하기!

https://dia-na.tistory.com 2011. 1. 28. 01:30

몸(!)으로 공부하기

김해완 (수유+너머)

보통 공부는 머리로 한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다닐 때도 체육시간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란 머리가 좋은 사람, 즉 빠른 시간 안에 지식을 습득하는 사람을 뜻한다. 학교에서 끊임없이 지능지수를 검사하고 기록하는 이유도 그 까닭이다. 지능지수를 알면 그 아이의 학습상태를 알 수 있다는 생각. 그에 발 맞춰 온갖 참고서들이 등장하고 있다. 참고서란 무엇인가? 풍부하고 방대한 지식들을 압축하고 핵심만 뽑아낸 텍스트이다. 이것을 이용하면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공부하는데 도움을 받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공부하는 데 시간을 더욱 절약할 수 있다. 도서관에 가면 책상위에 책보다 참고서가 더 많이 펼쳐져 있는 이유다. 도서관, 지능지수, 참고서, 머리. 바로 이 풍경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의 이미지, 공부에 대한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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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의 과열상태' _ 몸을 쓰지 않는 공부는 거대한 지식을 쌓으면서도 삶을 병들게 한다.

그런데 만약 머리로 하는 공부만 있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도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공부가 고상한 정신운동이 아니라 내 신체를 변하게 하는 물리적인 운동이 된다면?
나는 기본지식도 없이 『노마디즘』을 정말 ‘무식’하게 독파한 경험이 있다. 이 책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의 고원』이라는 철학책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이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 들뢰즈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어른들도 읽기 힘들다는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순전히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한 선생님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이 책을 읽고 글을 써오길 요구하셨고 그러면 그 글을 첨삭해 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오직 선생님을 만나겠다는 불순한(?) 마음으로 그 제안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만 앞섰을 뿐, 실제로 철학책을 펼쳐든 순간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씨’로다. 이 상투적인 표현이 이때만큼 절절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개념들이 난무했다. 분명히 한국어로 쓰여 있는데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몇 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런 내용을 써야 했는지 그 맥락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서야 들뢰즈가 니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오직 (너무 너무 보기도 싫은)1000쪽짜리 책만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학교 공부할 때처럼 참고서를 볼 수도 없었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온몸으로 부딪혀 정면으로 통과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제자에게 책을 읽을 때 등 뒤에 검이 있다고 생각하라고 했던 동양의 어느 옛 스승을 생각했다. 졸지 말라, 등에 칼 맞는다!

결국 나는 책을 끝까지 읽어냈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나 개념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직 책과 대결하는 내 신체만 남았다. 새로운 지식과의 만남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장 책 앞에서 도망가려는 내 신체를 붙잡아 두는 훈련이었다. 신체의 변화! 그것이야말로 정말 큰 공부였다. 알 수 없는 텍스트, 그 단단한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는 집중력과 의지와 끈기를 가져야 한다. 내 몸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 동원했을 때 그나마 책과 대면할 수라도 있다. 물론 중간에 포기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책을 읽는 와중 단 한 구절이라도 내 온몸에 벼락처럼 꽂힌다면 그것은 또 다른 방향으로 나를 변하게 할 것이다. 이 정도면 몸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가? 단순히 머리에 지식을 추가하는 일이라면 인간보다 컴퓨터가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몸을 바꾼다는 것, 그것은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으며 누구보다도 나를 위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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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아이가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말하기 위해 수만번 실수를 하는 것처럼, 제대로 된 화음을 내기 위해 수십번 코드를 고쳐잡는 것처럼. '공부'는 늘 '몸'과 함께 간다.

책으로 내 신체를 바꿀 정도면 아주 찐한 독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 찐한 만남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책보다 오히려 생판 모르는 어려운 책을 읽는 편이 더 쉬울 수 있다. 완전히 모르는 새로운 세계,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텍스트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어떻게든 텍스트와 내가 만나는 지점을 찾기 위해 오감을 총동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를 머리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는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쪽의 논리에 의하면 공부를 잘하는 것은 빠르고 정확하게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고,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짜놓은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이들에게 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미 가공된 지식을 순서에 맞게 주워 먹는 것이다. 참고서는 텍스트를 낱낱이 분해하고 손질하고 조리하고 테이블 세팅까지 마친 후, 심지어 입에 떠먹여 주기까지 한다.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 없는, 머리만 굴리면 되는 공부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머리에 잠깐 왔다가 흘러가버리는 지식의 조각들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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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좋은 공부는 머리에 '쌓이는' 지식이 아니라 몸에 '새기는' 공부.
직접 텍스트를 만나는 것. 그 중에서도 몇 백 년의 세월의 흐름을 거친 굵직굵직한 책들을 읽는 것. 이런 고전들이야말로 속에 품고 있는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신체를 변하게 한다. 내 주변에는 그런 책을 온몸으로 읽어낸 사람들이 많다. 책을 통해 인생역전을 한 경험담도 들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 박지원의 『열하일기』, 마르크스의 『자본』……. 그 외에도 세상에는 고전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머리가 나빠서 이런 책들을 읽지 못할 거라며 지레짐작으로 포기를 한다. 이런 태도는 이미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책 앞에서 우리끼리 지능의 우월함을 재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떡갈나무 아래서 도토리들이 키 재는 것과 똑같다고나 할까. 몸으로 공부를 할 때 필요한 것은 이런 지능지수가 아니라 집념과 의지와 끈기와 텍스트를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기 신체를 바꾸는 것, 자기 신체를 사용하는 것은 자기밖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두가 각자의 길을 홀로 가는 것이 공부다. 같은 책을 읽을 때 누구는 한 달이 걸리고 누구는 일 년이 걸렸다 하더라도 전자가 후자보다 더 공부를 잘 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둘 중에 누가 더 신체의 변화를 겪었을까? 모를 일이다.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똑똑하면 똑똑한 대로, 다들 묵묵히 각자의 길에서 신체가 자꾸만 도망가려는 낯선 텍스트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어떤 활동을 하던 간에 몸을 쓸 수밖에 없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가며 참고서를 푸는 것도 몸을 쓰는 일에 포함된다. 머리도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리(지능)가 신체 중에서 가장 우월하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생각, 바로 그것이 몸과 머리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로 공부를 하면 몸은 필연적으로 소외된다. 공부의 결과는 지능지수와 점수로 확인가능하다는 믿음에 의해,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도서관 책상 앞에 앉아 등을 잔뜩 구부리고 있다. 그러나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수험생, 재수생, 삼수생, 고시생, 취업준비생,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도 이 기나긴 세월동안 몸과 삶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면 그 공부는 어떤 의미인걸까? 어쩌면, 책을 덮고 밖에 나가서 구부린 등을 피고 뜀박질을 하는 것이 더 큰 공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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