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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호멧의 성전(종교싸움).

https://dia-na.tistory.com 2011. 5. 29. 11:00
 

쿠라이시족은 마호멧을 거짓말쟁이라느니 “시인”이라느니 하고 조롱했다.

그들은 모슬렘에게 돌을 던지기도 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신자에게 기독교국인 아비시니아로 피신하도록 권하여야만 했다.

80명의 신자는 피난민을 받아 들여 졌다.

쿠라이시족 일당은 아비시니아왕 네구스에게 그들이 기독교를 중상한 자들이므로 즉각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멕카사람들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추궁을 당했다.

모슬렘의 지도자는 이슬람이 기독교를 모욕하고 있는지 마리아의 장(章)이 있는 대목을 읽어 주었다.

코란은 예수는 단순한 예언자의 한 사람에 불과하며 신의 아들은 아니라고 못박고 있었으나

예수와 성모에게 최고의 존경을 보내고 있었다.

네구스는 그 견해를 인정, 모슬렘들의 체류를 허용했다.


멕카에 있던 마호멧과 신자들은 점점 더 가혹한 공격을 받았다.

그 무렵 아내 하디자가 죽고 그의 뒤를 따르듯이 마호멧을 양육하고 그를 적으로부터 지켜준 숙부 아브 탈리브가 세상을 떠났다.

메카에서 마호멧의 입장은 극히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 마침내 멕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먼저 타이프로 갔다.

타이프 사람들도 그를 조소하고 모욕했다.

하는수 없이 멕카로 되돌아 왔다.

이때 마호멧에 구원의 손길이 뻗쳐졌다.

마호멧의 가르침을 듣고 감동한 야드립의 순례자들이 자기들의 도시로 와 달라고 청해 온 것이다.

야드립은 2개의 아랍인부족 사이의 싸움으로 분열되어 있어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중재자를 필요로 하고있었다.

마호멧은 이 초청을 수락하고 신자들에게 자기보다 한 걸음 먼저 야드립으로 향하도록 권고했다. 수주일 후에 예언자 자신이 멕카를 빠져나가 그들과 합류했다.

“히즈라” 또는 “헤지라”로서 알려진 유명한 이 성천(聖遷)이 있었던 것은 기원 622년 9월의 일이었다. 후에 이 해는 이슬람력(曆) 의 기원이 되었다.


부족을 중심으로 서로 반목하고 있던 아랍인도 차츰 예언자 마호멧을 통한 신의 명령에 따르게 되었다.

혈연대신신앙이 들어서서 예로부터의 부족끼리의 적대감정을 누르고 혁명적인 정치체제를 건설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새 이슬람 사히의 중심이 된 야드립은 이윽고 “마디나 알나비”(예언자의 도시) 또는 약하여 “메디나” 즉 도시라 불리게 된다.

메디나에 옮긴 후의 그는 새롭고 강력한 역할을 수행하여 그의 종교 및 정치상의 권위도 높아졌다. 그에게 제시된 천계의  성격도 이 새로운 입장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에서부터 입법적, 사회적인 내용으로 달라져 갔다.


얼마간의 유태인 씨족은 메디나에서 가장 풍요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곳의 오아시스를 지매하고 있던 아랍인 부족 2개 중 하나와 정식으로 동맹을 맺고 있었다.

마호멧은 유태인들에게 자신을 예언자로 인정하도록 요구하고, 그것을 통해 메디나에서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다.

마호멧은 유태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속죄일의 단식이나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습관 등 유태인의 종교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유태인 중엔 모슬렘으로 전향한 자도 조금은 있었으나 대다수는 이슬람의 발전을 자기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들은 마호멧을 예언자로 받아들이기는커녕 그 요구를 물리치고 그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마호멧의 계시는 유태인의 성전(聖典)과 모순된다.

따라서 잘못된 것이다. 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마호멧은 유태인이 자기들의 성전을 곡해하고 있다.

코란만이 진실한 신의 말씀이다. 라고 응수했다.

유태인의 지지를 얻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우선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사회의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마호멧은 점차 이슬람 특유의 종교를 만들어 갔다.

기독교나 유태교가 종교상 사용하고 있던 딱다기라든가 숫양(雄羊)의 뿔피리 대신 아비시니아 출신의 신자 빌랄의 낭랑한 목소리가 신자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리게 되었다.

이슬람 사회에는 일정한 시간에 모슬렘들을 예배에 소집하는 시보계(時報係 : 무에찐)가 있는데 빌랄이 초대 무에찐이었다.

속죄일의 단식대신 라마단(이스라엘의 태음력 9월)에 1개월간의 단식을 하게 되었다.

모슬렘들은 예루살렘 대신 알라의 신전인 멕카의 카바로 향하여 꿇어 엎드리도록 명령을 받았다.

카바의 벽에 박아 넣은 거룩한 운석 “검은 돌”에 입맞춤하는 것도 신성한 행위라는 인가를 받았다.


마호멧은 시자들을 거느리고 메디나의 영토를 통과하는 대상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것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멕카에 남겨 두고 온 가족이 박해를 받고  rm 재산을 몰수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메디나의 신자들이 멕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제의했기 때문에 마호멧은 회유책으로서 멕카의 대상을 습격케 했다.

 

모슬렘과 멕카 사람들 간에 최초의 큰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모슬렘이 메디나로 옮기고 나서 2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마호멧은 푸짐한 짐을  싫은 멕카의 대상이 메디나 근처를 통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즉시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 소문을 들은 대상의 리더가 바로 진로를 변경함과 동시에 메카에 급사를 보내 응원을 청했다. 그 결과 대상은 습격을 면하였으나, 멕카로부터의 응원군은 메디나 남서쪽의 대상 중계지인 바드르에서 모슬렘 군과 격돌하게 되었다.

 

마호멧은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있었으나 멕카측의 군세는 1,000명에 가까웠다.

모슬렘군은 결단코 물러설 수 없는 처지였다.

멕카측으로서는 멕카와 그 상업에 두 번 다시 간섭할 수 없도록 마호멧 일당에게 본때를 보일 다시없는 기회였다.

마호멧은 근처에 몸을 숨기고 병사들을 지휘하며 양군이 교전하는 꽤 오랜 시간을 기도에 골몰했다. 결과는 마호멧 측의 승리였다.

멕카측으로서는 패배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예상 밖의 상태였다.

모슬렘의 놀라운 승리는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아람인은 모두 그것을 기적으로 보고 예언자 마호멧의 운동에 대한 신의 은총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신의 사도라고 자칭하는 마호멧의 주장은 절대적인 신뢰를 획득했다.

모슬렘병사들이 전리품을 분배받았기 때문에 알라측에 붙으면 천국에 가서 예언자가 약속해 주듯 가장 관능적인 쾌락을 마음껏 추구할 수가 있다고 믿었다.

인근 부족은 이슬람에 가담하여 그 깃발 밑에서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쿠라이시족은 바드르에서의 패배를 중시하여 다음해에 3,000명의 군대로 메디나의 모슬렘을 공격하여 그들에게 약간의 타격을 주었다.

예언자 자신도 이 싸움에서 상처를 입었다.

다시 2년 후인 627년, 멕카 사람들은 마호멧을 말살 시켜 버리기 위해 동맹군을 가담시킨 합계 1만의 군세로 메디나에 대규모적인 공격을 가했다.

최전선에는 모슬렘을 단숨에 압도할 셈으로 용맹한 기병 600명을 배치했다.

마호멧은 메디나에서 방비가 없는 부분의 전면에 깊은 호를 파서 비워 두었다.

이것은 축성술(築城術)에 능한 페르시아인 신자의 조언에 따른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사막의 전쟁에 있어서 새로운 전술이었다.

적은 호에 부딪쳐 당황했다.

기병도 쓸모가 없어 돌격을 중지했다.

멕카측은 메디나 교회에 야영하며 작전을 다시 세워 오아시스 안의 유태인 일파와 결탁하여 모슬렘을 내부로부터 교란시키려 했다.

그러나 유태인과의 교섭도 실패로 끝났다.

이윽고 기후가 싸늘해 졌다.

40일 후에 멕카 사람들은 사기도 떨어지고 양식도 떨어져 멕카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태인이 멕카 사람들과 협상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마호멧은 그들에 가혹한 태도로 임했다.

그는 약 6,000명의 유태인 성인남자 전부를 참수에 처하고 아녀자들을 노예로 삼았다.

유태인의 소유지는 모슬렘에게 주어졌다.

종교지도자가 이러한 폭력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기이한 느낌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디나 사람들로 본다면 실정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유태인과 아랍인 사이에는 오랫동안 동맹이 맺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은 배신행위를 한 것이다.

마호멧이 이것을 묵인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왜냐하면 베두인 사이에서는 동맹은 문자 그대로 신성불가침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호멧은 이와 같이 단호한 조처를 통해서 유태인과 그 밖의 모든 미래의 적에 대해서 저항하면 가혹한 보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한 실례로써 보여주었다.

아랍 동포에 대해서는 분열 시켜온 원인인 부족 중심적 충성심을 이슬람 전체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쳤다.

출처 : vmfkdlem
글쓴이 : fridr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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