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자크 루이 다비드의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

https://dia-na.tistory.com 2011. 9. 28. 23:26

 

자크 루이 다비드의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

 

 

 

 

 

다비드의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의 부분

 

1789년의 살롱전 출품작 가운데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93은 루이 16세의 방탕한 동생 다르투아 백작을 위해 그린 것이다. 1786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은 이듬해 살롱전에 출품할 계획이었으나 그해 10월에 아킬레스건을 다치고 이듬해는 오랫동안 병을 앓게 되어 1788년에야 완성했다.

파리스는 트로이 최후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로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헤카베는 횃불이 도시 전체를 불태우는 꿈을 꾸었다. 이는 트로이의 멸망을 의미하는 불길한 전조라 하여 파리스를 이다산에 버렸으나, 목자들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잔치에 여러 신들이 초대될 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 제외되었다. 노한 에리스가 연회석에 던진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라고 쓰인 황금사과를 놓고 아테나, 헤라, 아프로디네 세 여신이 다투자 제우스는 그 심판을 파리스에게 맡겼다. 여신들은 파리스에게 달려가 자신을 뽑아달라고 청탁했다. 아테나는 지혜를, 헤라는 세계의 주권을,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했고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갖게 해주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유혹하여 트로이로 데려갔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원정길에 나섰고 이로 인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찍이 헬레네에게 구혼했던 자들도 메넬라오스와 협력하여 트로이로 진격했다.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트로이군의 헥토르와 아이네아스 등 숱한 영웅과 신들이 얽혀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계책으로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난다. 파리스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자 메넬라오스와 함께 스파르타로 돌아온 헬레네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다가 두 사람 모두 행복의 땅, 엘리시온으로 갔다고 한다.

다비드는 파리스와 헬레네를 부드럽고 조각적으로 묘사하면서 미묘한 빛의 세례를 받게 했는데 <호라티우스의 맹세>8와 <소크라테스의 죽음>10에서와 같은 극적인 장면과는 완전히 달라 회화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1789년의 살롱에 출품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또 하나의 작품으로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94이 있다. 라부아지에는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였다. 그는 정부의 위임을 받아 세금을 징수하는 회사에 투자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훗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진보적이고 지성적 엘리트인 그는 프리메이슨*이었고 이런 인연으로 다비드를 만나게 되었다. 과학자인 그는 화약을 담당한 책임자였는데, 8월 6일 화약을 파리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 파리 병기고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다비드는 라부아지에의 아내 마리 앤이 남편의 어깨에 비스듬히 기댄 다정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바라보도록 했다. 마리 앤은 다비드로부터 드로잉을 배웠고 남편의 작업을 삽화로 그리거나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하면서 영국 과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다비드는 라부아지에를 자료를 기록하는 과학자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 커다란 작품의 댓가로 받은 7천 리브라는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리고 왕으로부터 받은 돈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출처 : 광우의 문화읽기
글쓴이 : 김광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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