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의 수요일- 일본군 '위안부'할머니들이 외치는 당당한 희망

https://dia-na.tistory.com 2012. 1. 21. 19:16

 

 

지난 1월 18일 1005회차 수요집회에 갔다가 그곳에서 산 책이다.

최근 무한도전 <나름가수다>에서 '키큰 노총각이야기'가 음원순위에서도 상위에 랭크되는 이유가

정준하의 실제 삶이 녹아든 진정성이 깃든 가사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의 내용도 그렇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접했을 때와

이 책을 통해 상세한 이야기를 읽어낼 때의 정서는 사뭇 다르다.

울컥 울컥 눈물이 솟는 부분이 많았다.

그 만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이 서럽기도 했거니와

이 글을 풀어쓴 저자의 글쓰기에 진심이 묻어났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책을 읽고나서 주제별로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1. 용어 논쟁- 정신대, 종군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9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군'위안부' 명칭은 통일되지 않은 체 정신대란 용어로 쓰이기도 했다.

책에 씌인 용어를 정리해 보면

정신대(挺身隊) :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뜻으로 여기서 나라는 일제를 가리킨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에 이르는 일제 강점기 말 무렵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전쟁 수행의 도구로 동원하기 시작. 이때 징용된 노동자들은 주로 도로나 철도, 비행장, 신사 등을 건설하는데 동원되었고, 각종 군사 시설 건설에 파견되기도 했다.

 

 

정신대는 강제 노역동원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일본군 '위안부'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위안부Comfort Woman  ‘위로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여성’ :

일제는 1930년대 초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식민지 조선과 대만, 중국 등 일본군의 점령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다. 위안부란 이름은 일제의 강제 징용 정책 중 일본군 성 노예제도를 의미하는 말로 군인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러한 위안부란 말에는 '종군'이란 말을 붙여 일본사회에서는 '종군위안부'란 용어를 쓰기도 했다.

 

종군위안부 : 일분군 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하던 1980년 후반부터 1990년대 초기에 일본사회에서 사용한 말. ‘종군(從軍)’이라는 말은 ‘군을 따른다’는 듯으로 군인의 입장에서 붙인 말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다니며 위안을 주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제2차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일본군‘위안부’ 로 사용을 결정했다. 영어로는 Militar Sezual Slavery by Japan ‘일본군 성노예’이다.

2004년 5월 남북한,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대만, 미국 등 관련시민단체들과 생존자들이 참석한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제도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되, ‘일본군 성 노예제도’라는 말도 함께 사용하며, 피해자를 지칭할 때는 ‘일본군 성 노예제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제도 피해자’로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즉, 종군이란 말속에는 자발적인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에 주체인 일본군으로 대체하고 '위안부'에만 ''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 책에는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를 지칭할 때 일본군'위안부'란 말로 통일되어 있다. 나역시도...)

 

 

2. 위안부는 왜 만들어졌을까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1) 군인들의 사기 진작

2) 군인들의 성병 예방

3) 점령지에서의 강간 사건 예방 차원에서다.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는 1932년 제1차 상해사변때 오카무라 야스지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이 상해지역에서 발생한 몇 건의 강간사건을 계기로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상하이 사범대학 교수인 쓰즈량(蘇智良) 교수(역사학과. 중국위안부연구센터 주임)는 상하이 시내 곳곳에서 역사자료와 주민 고증을 통해 149곳의 위안소 건물 등을 찾아내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 위안소 위치를 나타낸 지도

-출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e역사관-

 

나무막사로 지어진 상해 육군 오락소

각 방에 위안부를 한 명씩 넣어두고 군인들을 받게 하였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위안소 형태 외에도 중국인 집이나 상가를 이용하든가 전방에서는 천막으로 급조하여 사용하였다.

-출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e역사관-

 

 

 

3. 일분군 ‘위안부’는 누가 운영했나?

 

현재 일본정부는 전쟁 중 국가가 ‘위안부’제도를 설립하고 운영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정부는 1992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쳐 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하고, 중대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던 점을 인정했지만, ‘애매 모호한 표현’으로 일본정부의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 국가가 주도해서 ‘위안부’제도를 설립하고 ‘위안부’를모집하고 위안소를 운영한 것을 부인한 것이다. 1993년 일본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에서 주요책임은 민간 업자에게 돌리고 있고 군은 약간 관여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4.소녀들은 어떻게 납치되었나?

 

                                  

<끌려감> 김순덕 할머니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납치하거나 유학 등을 미끼로 ‘위안부’를 모집하기도 했지만 징집이라는 형태로도 여성을 동원했다.

대만의 일본군 ‘위안부’피해자인 탱카오 파오추 할머니는 관할 구청으로부터 중국 광둥 지역에서 ‘위안부’로 일하라는 내용의 징병 문서를 받았으며, 김복동 할머니는 한 일분군과 마을 이장이 할머니의 어머니를 찾아와 집에 아들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할머니를 정신대원으로서 군복 공장에 데려가는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고 증언했다.

 

그렇게 끌려간 소녀들은 상습적인 성폭행과 심각한 구타에 시달려야했으며

상대해야하는 군인이 하루에 적게는 5며미만에서 많게는 6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구타와 고문, 성병감염, 인공유산, 불임수술, 자궁적출 등 폭력이 행해졌으며 전쟁후에도 많은 생존자들은 위안소에서 받은 폭력과 고문등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상해에 처음 세워진 위안소의 외부

정문에 "성전의 승리를 위해 용사를 환영합니다. 신심을 다해 봉사하는 일본 여성의 서비스"라는 글이 보인다. 군위안소는 군이 직접 운영하거나 민간에 위임하였는데 어느 경우에나 군대의 보호 감독 및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출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e역사관-

 

중국 상하이 주둔지에서 군의관을 했던 일본인 아소 테츠오는 자신의 일지에 “조선에 연행되어 온 여성들은 일본 사병들의 성 배설을 위한 위생적인 공중 변소”였다고 기록. “사병들에게 내린 천황의 선물”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5. 해방, 그리고 버려진 소녀들

 

어느날 갑자기 일본군이 사라졌다. 해방이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들은  종전직후 일분군에 살해당하거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이유로 중국인들에게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피해자 6명중 네명은 고국으로 돌아온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고향을 찾지 못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대로 버려진 위안부들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지대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를 당시 연합군이 촬영한 사진이다. 4명의 위안부 중 유일하게 임신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분이 북한에 생존해 계신 것을 2000년 8월에 알게 되었다. 북한 남포시에 살고 있는 박영심(朴永心, 78세)할머니로서 북한을 방문했던 일본인 자유기고가 니시노 루미코(西野瑠美子)의 추적으로 생존 사실이 극적으로 확인됐다.

 

 

 

6. 희망의 불씨를 지핀 사람들

 

이렇게 아픈 역사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한국정신대 대책협의회 초대 대표 윤정옥 선생님과 사회학자인 이효재 선생님의 역할이 크다. (두 분은 일분군 ‘위안부’피해자들과 비슷한 연배다.)

 

대학1학년때 ‘정신대’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학교를 자퇴한 윤정옥 선생님은 해방후 ‘정신대’로 끌려갔던 친구들이 돌아오지 않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의식을 느껴 ‘위안부’여성들에 대한 관심과 추적을 시작한다. 

그리고 1990년 1월 한 일간지에 4회에 걸쳐 <정신대 원혼의 발자취>란 글을 발표하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한국교회여성연합회(한교여연)를 비롯한 여성 단체의 도움을 받아 이후 활동을 이어갔다.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서 한교여연과 한국 여성 단체 연합의 요청으로 대통령은 일분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 명단을 요구하게 된다.

1990년 11월 16일 일분군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단체 결성한다.‘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정대협)'이 그것이다. 이어

1991년 ‘정신대 신고전화’개설. 피해자들의 공개증언을 이끌어냈고

1993년 국회의원과 연대하여 일분군 ‘우안부’피해자 생활 지원법 제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1992년 1월 8일 수요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총리가 한국 방문을 계기로 일분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최초의 수요 시위가 열리게 되었다.

 

 

                                              

<빼앗긴 순정> 강덕경 할머니

 

 

7. 김학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일분군 ‘위안부’피해자 중 최초로 TV 공개증언에 나섰으며 고백은 또 다른 고백을 낳게 되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첫 신고 이후 2009년 12월말까지 피해자로 신고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모두 234명이다.

 연구자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된 여성의 수를 10만에서 2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한편 호주에 사고 있던 네덜란드계 얀 루프 할머니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보고 2007년 2월 15일 미국 하원에서 개최된 일본군 ‘위안부’사죄 촉구 결의안 채택을 위한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여 피부색이 같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백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후 호주, 네덜란드, 필리픽, 대만,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등에 공개증언이 이어졌으며 마침내 유럽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 2007년 2월 15일 미국 하원에서 개최된 일본군 ‘위안부’사죄 촉구 결의안 채택을 위한 청문회에 한국의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가 증언. 같은해 11월에 네덜란드의 엘렌 할머니와 필리핀의 메넨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가 네덜란드, 유럽연합, 독일 벨기에, 영국 등 유럽나라들을 방문하여 네덜란드와 유럽 연합 의회에서 정부에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 유럽연합의호에서는 ‘일본군 ‘위안부’피해자에게 정의를!’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정부에 일본군 성 노예제도에 대한 공식 인정과 사과, 피해자와 유족에게 법적인 배상, 교과서에 성 노예 제도를 기록하여 올바르게 교육할 것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서 발표함.

 

8. 아직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1994년 무랴야마 도이치 사회당 당수가 일본 총리가 되었다. 무라야마 총리는 집권 전 1994년 6월 도쿄엣 있었던 전후 청산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석해 한국의 피해자들과 일본의 시민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공개 발언을 했던 인물이다.

이 정부는 ‘전후 50주년 프로젝트’를 만들어 1995년붙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설립(국민기금)하여 모금을 시작한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일본 국민과 일본 사회를 향해서는 ‘국민기금’이 도의적인 책임에서 지금하는 위로금이라고 설명하고 국제사회에는 이것을 보상 compenstion으로 홍보하는 이중적인 행동을 취한다.

 

 

 

"국민기금 철회하고 국제법적 배상을 실시하라"는 플랭카드를 들고 계신 할머니. 강덕경 할머니 노제로 행해진 시위에서 얼굴이 그려진 천을 들고 계신 문필기 할머니 모습이 보인다.
90년 6월 일본 국회에서 일본정부는 국가 개입을 부인하였으나 정대협의 운동으로 국가 개입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진상 조사를 실시하여 92년 7월 1차 보고서를 발표하였고 93년에 발표된 2차 보고서에서 강제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책임자를 처벌하고 정부의 공식사죄, 책임 배상을 원하는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민간기금으로 이를 무마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 내 우익들은 여전히 정신대를 부인하는 망언을 일삼고 있다.

 

 

 

9. 1965년 한일 협정과 일본군 ‘위안부’

지난 20년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중요안 요인은 한일협정때문이다.

일본은 3억달러를 우리나라에 무상지급하고 2억달러를 10년에 걸쳐 빌려주었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식민지 범죄에 대한 배상이 아닌 독립 축하금 및 경제협력금이라는 명목으로 지급했다고 국내에 홍보하고 국제사회에는 전쟁에 대한 보상금으로 지급했다고 설명하였다.

 

일본정부는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가 체결한 협정에 의해 청구인들이 가진 권리가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며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법적 책임을 부정해 왔다. 한일협정이라고 부르는 이 협정의 정확한 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분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이다.

그러나 협정서에는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원폭 피해자, 사할린 억류자등의 배상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설사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일 간에 배상 문제가 끝났다고 할지라도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까지 소멸될 수는 없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 사례로 한일협정은 배상 청구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10. 전쟁과 여성,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연

 

그런데 일본군'위안부'문제가 꼭 일본과 조선인 위안부들만의 문제일까?

 

-제2의 일본군 ‘위안부’

일본은 전쟁이 끝난 후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위해 ‘위안소’를 설립한다.

‘특수위안시설협회 Recreation and Amusement Accociation'RAA'는 폭격으로 부서진 공장에서 숨어 지내던 여성들을 유인해 ’위안부‘로 고용했다. 이들은 대부분 전쟁 당시 ‘학생동원령’을 통해 모집한 소녀들들로 여기에 전쟁으로 부모잃은 소녀와 성매매업소 여성등 사회적 소외계층 여성들을 위안부로 이용했다.

1945년 8월 새로운 ‘위안부’에게 전달된 일본 정부의 성명서에는 “전후 처리의 국가적 긴급 시설의 하나인 진주군 위안부라는 어려운 사업을 담당한다. (중략) 수천의 제물이 되어 광란을 막을 방파제를 쌓아 순혈(純血)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한다”

라며 위안부 여성들은 ‘제물’과 ‘방파제’에 비유했다.

 이 여성들이 지켜내야 하는 것은 ‘순혈’. 민족의 깨끗한 피를 보존한다는 것은 다른 민족과 피를 섞지 않겠다는 것이다.

 

위안부 RAA는 극단적인 민주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순혈주의와 남성우월주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는 일본인들만의 만행이었을까?

우리나라 또한 주한 미군을 위해  일본의 RAA와 비슷한 기지촌을 만들었다. 기지촌은 우리가 만든 식민지인 셈이다.

일본군과 비슷한 과오를 우리 또한 베트남에서 저질렀던 과거가 있다.

 

 1964년, 베트남 전역이 공산화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자작극으로 밝혀진 ‘통킹만 사건’을 핑계로 1975년까지 베트남전에 개입한다.

미국과 베트남의 요청에 따라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1964년 9월~1973년 3월까지 약 8년 6개월 동안 베트남 중부의 농촌이나 연안의 각 마을에 주둔하면서 유격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특히 '빈호아‘마을에서 한국군은 민간인 36명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과 수류탄으로 몰살시켜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로 시작되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지기도했다.

 

당시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전쟁 범죄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한국군 수뇌부는 ‘위안부’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는데, 전쟁이 더 길어졌다면 일본군 위안소와 같은 시설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1995년 보스니아 내전에서 2만 명이 넘는 보스니아 무슬림 여성들이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강간당하거나 살해되었다. 당시 성폭행 피해여성은 6세부터 80세에 이르렀다고 한다.

-르완다에서는  약 50만명의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범죄행위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는 군인들은 심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한 병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상대방을 가장 아프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잠시 후 병사는 질문을 바꿔봅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상대방에게도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까?’

병사는 곧바로 답을 찾아내지요.

‘그래, 녀석들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이야!’

군사적인 선택이 아니더라도 전장에서 군인들은 적에 대한 증오를 점령지의 여성에게 해소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일본군이 임신한 여성이나 성병에 걸려 효용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여성들을 버린 것이나, 이미 정절을 잃은 여자는 가족으로서나 아내로서 가치를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가부장적 관점에서 비롯된 견해다. 

수없이 많은 침략을 받아온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째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이 이렇게 많은 논란이 된 것일까? 그것은 용감하고 뜻있는 사람들이 여성의 권익을 위해 노력해 온 결과이다.

 

독일의 한 심포지엄에서 일본계 여성이 했던 질문,

“한국군도 베트남에서 여성들을 강간하지 않았나요? 한국 정부는 그 여성들에게 어떤 책임을 졌나요? 일본 정부와 다를 것이 없는데 왜 일본에게만 책임을 묻는 건가요?”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문제를 넘어선 인류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11. 우리가 만들어가야할 미래 - 인권과 평화의 세상을 향해.

 

- 일본, 건강한 반성의 목소리

 2008년 3월에 일본 효고현의 다카라즈카 시 의회에서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을 실시하고 피해자의 존엄 회복에 대해 노력하고 성실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을 채택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6월에 도쿄 기요세 시 의호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식 인정하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내용의 결의를 채택하였으며 11월 삿포로 시 의회에서도 의견서 가결시켰고 점차 일본 전역으로 확산 중이다.

 

-베트남, 우리의 숙제

우리나라 인권단체들이 참여해 베트남에 학교 설립하는 운동이 2000년 이후 시작되었다. ‘부끄러운 역사에 용서를 빌자-베트남전 양민학살, 그 악몽 청산을 위한 성금 모금 캠페인’벌임. 베트남 푸옌성에 ‘한국-베트남 평화공원’ 건립하였으며 정대협과도 인연을 맺었다.

윤정옥 선생님은  ‘한국 베트남 시민 연대’ 만들어 베트남에 학교 건축하고 학생들에게 컴퓨터와 학용품 보내기 등의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는 더이상 우리나라와 일본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해야할 일은,

지난 과거의 반성과 함께 평화운동을 펼쳐 가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남성위주의 가부장제와 전쟁의 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