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 함께 하는 현대사 이야기> 연수 후기

https://dia-na.tistory.com 2010. 5. 23. 13:40

 

 

학기 중 연수는 계륵 같은 것

                                                 

의기 충천. 처음 연수를 신청할 땐 언제나 그랬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다가오면 신청서를 써낸 오른손을 저주하며 그때 왜 그랬을까. 왜 이눔의 손은 가만 있질 않고 신청서에 냉큼 사인을 해 보냈을까. 그냥 집에서 책을 보며 뒹글거리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텐데. 쓸데 없는 호기심이 문제야 문제!!! 하며 스스로를 책망하곤 한다.

물론 연수를 마치고 나면 책으로 얻는 것보다 훨씬 값진 선물을 하사받은 마음에 저주했던 오른손을 사면하고 축복까지 내려주긴 하지만...


역사과가 아니더라도 사회과목과 관련있는 교사라면 대부분 현대사 연수에 대한 갈망을 안고 있음을 본다. 중학교의 경우 2학년 세계사 영역에서 시민혁명을 다룬 후 3학년에 올라와 서양의 민주정치의 발달과정을 다시 되짚어 보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민주정치의 발달과정은 국사책 후미에만 언급될 뿐 정치영역에서는 생략되거나 어울리지 않는 영역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게 현실이다.

 

물론 이 정치과정도 교과서 개정으로 이제 딱 1년이 남았지만.


<선생님과 함께 하는 현대사 이야기>는 교사들의 현대사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단비같은 과정이 아닐까 싶다.

연수장소인 ‘서울유스호스텔’로 향하는 길은 서울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인공적인 산세에 가려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자동차로 가는 길 또한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라 내비게이션이 없었더라면 찾아가기 퍽이나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이유는 이틀째 남산 답사 현장에서 밝혀진다.


첫 번째 강연 - 역사 교육은 가지 않았던 길을 상상해 보게 하는 것이다.


첫날 첫 강연은 역사교사들 사이에선 명성이 자자한 역사교육연구소장이자 신현고등학교 교사인 김육훈 선생님의 <민주주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근현대사> 였다.

 김육훈 선생님이 처음 강연을 제안받을 때만 해도 역사교사 대상이겠거니 하고 심도깊은 주제를 준비하셨다가 연수생 대부분이 초등학교 교사이거나 역자 전공자가 아님을 알고 긴급히 주제를 바꾸셨다 한다.

 저녁 식사 후 이어지는 강연 주제는 주로 ‘수업방법’과 관련한 사례 발표 수업인데 반해 이 강연은 교수 내용 지식면에서 유익했던지라 녹취를 통해 강연의 대부분을 옮겨보았다.


대한 민국의 ‘대한’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강연은 늘 익숙한 이름이기에 무심히 들어왔던 국호에 대한 물음부터 시작되었다.

 ‘대한’이라는 1897년 고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대한’은 그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진다. 따라서 해방 국호가 자연스레 대한민국으로 정해졌을 것 같은데, 과정을 살펴보면 그리 순탄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47년 좌파진영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우파인 한국민주당은 대한민국을, 중도파는 고려공화국을 내세웠으나 1948년 5월, 남한 단독 선거에 좌파와 중도파가 빠짐으로써 이승만계열의 주도로 국호는 대한민국이 되었다고 한다. 제헌의회에 좌파와 중도파까지 가세하고 나중에 국호를 중도파의 고려공화국으로 내건 한국 민주당의 의견까지 더해졌다면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영문국호 코리아

  여기서 잠깐, 대한민국의 영문표기 논란을 살펴보자.

 2002년 월드컵 개최 당시 네티즌들 사이에 설왕설래했던 C코리아 (Corea)와 K코리아(Korea)의 논란의 진위는 무엇일까? 일제 강점기때 일본이 자기네 국호인 Japen의 J보다 Corea의 C가 알파벳 순서를 앞지르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K-Korea로 썼다는 항간의 소문은 정말 사실일까? 

 결론은 소문은 소문일뿐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1882년 미국과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 미 해군제독이 수교를 요청하는 서한을 조선에 보냈으나 당시 조선은 2가지 이유에서 거절을 했다고 한다. 첫째 수교를 요청한 해국제독의 직급이 너무 낮다는 것이요, 둘째는 조선을 일컬어 고려Corea라 칭하는데 조선은 고려를 멸망시킨 나라이므로 패망한 나라로 지칭된 것이 마뜩찮았다는 것이다.

 1890년대 이후 영미권을 중심으로 지칭된 K-코리아는 결국 당시 조선의 선택의 결과였던 것이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물론 영어권을 제외한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고려에서 비롯된 C-코리아로 불리긴 하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민(民)’

      - 백성,신민,인민,국민의 차이점은?


 한사람을 정의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동포, 국민, 민족 등등.

 그 중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은 국민과 시민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과서에 등장하는 신민과 백성, 또 인민은 국민과 어떻게 다를까?

 먼저 신민이라는 말은 대군주 폐하라는 시점을 동반한다. 신민과 군주폐하는 쌍으로 움직이는 말로 왕이 아니면 나머지는 모두가 신민이다. 한 국가 구성원 중에서 왕이 아니면 법적으로 신민은 모두 평등한 개념이다. 우리 역사상 신민이란 말은 근대적인 용어로 아주 짧은 기간에 씌여졌다. 갑오개혁당시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1896년 호적문서를 만들때부터 신분란이 사라지면서 고종 때 장돌뱅이가 2인자가 되기도 할만큼 한동안 평등한 신민들의 세상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백성 이란 말은 나라와 같이 움직이는 말로 시기에 따라 지칭하는 사람들이 다르다. 원래 백성이라는 말은 여러 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성은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5%도 안되었다고 한다) . 당시의 백성은 성씨를 가진 귀족신분으로 지배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피지배층이란 개념으로 확대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면 국가나 관(官)과 비교되는 개념으로서 관민으로 씌여졌다. 백성은 신민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신분을 인정하느냐의 차이가 있으며 순서로 따지자면 백성이 더 오래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나중에 나타난 인민(人民)이라는 말을 어떨까? 낱말을 쪼개어 보면 인(人)은 개인을, 민(民)은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뜻을 지닌다. 한 사람의 개인을 얘기할때 신민은 왕의 신하요, 백성은 관보다 낮은 민이요, 인민은 독립된 개인이다. 인민은 독립된 개인으로서 권리와 행위의 주체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면서 공동체의 구성원인 민(民)이기도 하다.

 이토록 멋진 말이 제헌국회때만 해도 사용되었다가 분단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선 고어가 되어 버렸다.


언제부터 단군은 우리의 할아버지가 되었을까?

 조선이 개국할 때 때 단군과 기자중 무엇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까? 정도전은 조선 이름을 정할 때 기자에 좀더 기운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성계의 조선이 단군 조선을 계승했다고 생각하지만 15세기엔 조선이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단군의 조선과 기자의 조선.

 기자가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중국에 문명이 결성될 무렵 조선에도 문명의 상징인 기자가 있었고 이것은 중국 문명과 대단히 유사하므로 조선=문명국 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므로 유학을 신봉하는 이들로써는 단군 조선보다는 기자조선에 대한 경도되었을 법 했다.

 우리 역사에서 단군이 정치적으로 부각된 것은 1909년 무렵이다. 당시 식자층에서는 ‘우리는 중국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일본을 따라잡을 수도 없다. 서둘러서 일본을 따라 잡자. 문명개화하자. 때에 따라 잠시 일본이 우리를 주도해도 좋다. ’라는 생각을 품으면서 단군을 민족의 상징으로 부각시켜 단군을 시조로 하는 일관된 역사체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단군을 시조로 한 민족개념은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일본을 정치경제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잖아, 독립해야지! ’하고 외치면서 어느 순간 독립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주주의 라는 말을 언제쯤부터 알았을까?

 군주제, 독재, 전제와 대비되는 개념인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한나라의 권력을 결정하는 문제로써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토대(빈곤의 문제 해결)와  상당수준의 이해(교육을 통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처음 사용한 건 임시정부 이전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1857년 최한기는 책을 통해 미국의 존재와 대통령제에 대해 알고 있었고 자신이 쓴 <지구전요>라는 책에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남기기도 했다. 고종 또한 많은 책을 읽고 대통령제와 서양의 정치제도에 대해 관심이 있었으며 한성순보를 보면 1884년에 이미 상당히 많은 사람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1884년 이후 전제군주제 말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하자는 주장이 현실화될 뻔 했던 적이 있었다. 1910년까지 군주제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통치자도 지식인들도 다른 방식의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08년 무렵 외신에는 ‘이 나라에서는 교육혁명이 진행중이다.’ 라고 소식을 전할 만큼  자발적으로 학교에 모여들어 ‘공부하여 애국하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들 목하 열공중이었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민족이라는 관념속에 공화주의 관념이 개입되기 시작한다.

 1917년때쯤이 되면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는 정치체제 구상속에 더 이상 군주제를 상정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한 나라가 패망하는데 있어 대한민국 황제가 열심히 싸우지 않은데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래 조선왕조는 일본 천황의 다음 가는 지위와 영예를 누리며 호화롭게 살았고 왕족의 그 누구도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독립 후 건설될 나라를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로 지향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의미는 크다.

임시정부의 탄생과정은 독립운동세력이 내부의 차이를 뛰어넘어 단결하여 일제와 싸우기로 한 것 자체로 의미가 크다. 공식적으로 1910년까지 왕이 다스리던 나라에서 이 것을 합의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1920녀에서 1945년 사이 독립운동진영에서는 어떤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였고 비슷한 사상을 가진이들끼리 독립운동과 국가발전에 대한 전략을 제시했다. 1920년대엔 누구나 일제에게서 나라를 되찾으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고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어떤 민주주의를 할 것인가?’, ‘이것을 위해 당장 해결해야할 문제는 무엇인가?’ 를 고민하였다.

 일제 강점기는 항일 저항 독립 운동의 과정이기도 했겠지만, 새롭게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 그래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국가건설 운동 이념이 형성되었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했는가


 김구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알다시피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였고 남한 단독으로 수립된 한국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헌국회 개회식때 이승만의 발언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정부는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대목이 있다. 그는 상해와 연해주 그리고 명목뿐이었던 국내 한성정부가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1925년 대통령에서 탄핵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은 서울의 한성정부에서 추대되었으므로 탄핵된 게 아니라며 임시정부법통을 이야기할 때 한성정부를 거론하였고,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은 UN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파에서 많이 거론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무엇인가?

 1948년 유엔이 인정한 대한민국 정부의 합법성은 38선 이남까지였다. 1950년 전쟁당시 이승만은 북한도 우리땅으로 생각하고  10월 1일 국군과 연합군이 38선 넘고 황해도, 강원도,평안도를 점령하자 그 지역에 도지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이들을 바로 추방시켜버린다. UN이 인정한 대한민국의 영토는 38선 이남이기 때문에 남한 정부의 통치권이 북한땅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우리는 북한 체제가 붕괴될 경우 북한땅은 당연히 우리땅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그럴까? 정통성만 운운하다보면 '그게 정말 옳은가?‘라는 정당성을 간과하게 되어 자가당착에 빠질 수가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을까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은 정말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을까? 아니면 싸워야 하니까 싸웠을까?

상당수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했단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일본이 팽창을 하게 되면 중국과 충돌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일본이 이긴다는 보장이 있을까? 설령 이긴다 해도 이웃한 러시아와의 접전이 있다. 이 싸움에서도 일본이 이긴다 치자. 그 다음은 태평양 건너 미국이 있다. 그때도 일본이 이길까?

당시는 제국주의시대이기에 기회가 온다고 믿었고 그래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항상 말하는 ‘1940년대엔 힘쎈 놈에게 붙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는 논리에 수긍을 하는 건 그 당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분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소련 때문에 분단국가가 되었을까


오스트리아의 예를 보자. 오스트리아는 패전국이었고 독일의 일부였지만 분할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은 패전국도 아닌데 왜 분단이 되었을까? 1945 미․소가 분할 점령했기 때문에 반드시 분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을 오스트리아에서 찾는다.

 오스트리아는 전후 파시스트를 먼저 제거하였다. 그래서 서로간에 대화가 오갈 수 있었다.

우리도 처음에 독립운동의 좌․우의 거리가 멀지 않았으나 대화의 선결조건이 되었어야할  파시스트가 청산되지 않았다. 때문에 좌․우의 폭이 넓어졌고 합의에 이르기가 어려웠다. 분단은 우리 안의 청산되지 못한 역사에서 기인된 것이다.


김육훈샘의 강연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우리나라에 진정한 우파가 존재하는가. 그들은 우파의 탈을 쓴 파시스트가 아니였나. 진정한 우파에 대한 강연은 다음날 듣게 된다. 3시간여동안 진지한 강연을 이끌어 갔던 김샘이 강연 내내 교사들을 향해 반복했던 메시지는 이 한마디였다.

“역사를 공부하며 가지 않았던 길을 더듬다보면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현실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현실이 된 과거 말고, 당시에 ‘가지 않았던 길’을 통해 또다른 미래를 생각해 보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방법이 아닐까요?”


두 번째 강연  ‘지금’ ‘여기’의 역사를 가르쳐라.

저녁을 먹고 시작한 강연은 충북 반도체고등학교 원종혁 샘의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는 현대사 수업>이다. 충청도 시골에 있는 전문계 고교에서 국사수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계신 원종혁샘의 노력과 열정이 엿보이는 강연이었다. 유머가 자체 내장되어 간간이 웃음을 유발시키곤 했던  원샘의 강연의 요지는  ‘지금’=현대사를 ‘여기’=지역사로 학생들의 현재상황에 맞게 재구성해서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 반도체고교처럼 손재주가 좋고 실험․실습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역사수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 프로젝트 수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문서를 만들어 자신만의 역사책을 만든다던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문화유산지도를 아크릴판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처지와 학생들의 수준을 고려한 학습방법을 도출하는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역사수업이 아닐까요?  ”


원종혁샘의 수업 노하우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1. 신학기 첫수업은 3․1운동으로!

 

 신학기 첫날 첫수업은 대부분 반 아이들 끼리의 소개시간을 갖거나 과목의 구성체계에 대해 언급을 하고 곧바로 수업에 임하기도 한다.

 학생들의 호기심과 집중력이 가장 높은 이날, 흔히 날짜가 지나버려서, 혹은 학기초여서 지나치기 일쑤인

3․1운동 계기수업을 한다. 물론 그 지역의 인물과 사건을 연계한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간수업계획과 교과서 구성에 관한 언급은 물론 그 다음 수업시간에 이뤄진다.

Good Idea! 내년엔 나도 따라해야지~.


2. 계기교육으로 하는 현대사 수업

원종혁샘이 근무하는 반도체고등학교에서는 <사료와 영상으로 배우는 마이스터고 국사배움책>을 교재로 만들어 수업을 진행하신다. (충북반도체고등학교는 작년에 마이스터고로 지정되었다.) 원샘이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재를 여러권 가져오셔서 수강생들이 내용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지역과 연관된 사료가 풍성하고 구성이 탄탄해 모두가 탐을 내었다. 결국 자료를 오픈하셔서 탐나는 자료를 통째로 얻는 행운을 얻은 게 이번 연수의 큰 소득 중 하나였다.

교재의 뒷부분엔 ‘계기 교육 민주화운동’이 수록되어 있는데 원샘은 교과 진도에 상관없이 시기 별로 계기교육을 꾸준히 이어감으로써 아이들의 삶과 밀접한 역사교육을 이끌어 가신다고 한다.


3. 지역사로 하는 현대사 수업

 살아있는 역사수업이 이루어지려면 자기 지역의 역사를 실례로 다루어야 한다. 지역사를 통해 중앙에 한정된 전체사를 생기있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업은 좋은 영상 준비와 함께 구조화된 수업을 진행하는 게 성패를 좌우한다. 역시나 교사의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4. 영상으로 하는 현대사 수업

 

반도체 고등학교 역사 교재 이름인 <사료와 영상으로 배우는 마이스터고 국사배움책> 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학생들의 흥미와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수업시간에 영상을 활용한 수업을 진행한다. 이때 아이들의 감성과 상상을 자극할 수 있는 영상을 준비하는 게 필요한데 예를 들면, 안중국 의사 순국 100주년 영상수업의 경우 EBS 지식채널e의 <네번째 묘>와 함께 영화<도마 안중근>의 저격장면과 순국장면을 짧게 보여준 뒤, 마무리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싸이트로 들어가 사이버분향을 하는 식이다.

 역사교사모임이 운영하는 한 서버에는 역사수업 관련 동영상 자료 탑재 및 안내가 상세히 되어 있어 역사교사모임의 회원이 되거나 회원으로 활동하시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것도 영상수업 진행의 수고를 더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5. 수행평가로 하는 현대사 수업

각종 역사관련 공모전을 수행평가와 연계시키는 것이다. ‘전국 중․고등학교 우리역사 바로 알기 대회’, ‘청소년 역사체험 발표대회’ ‘독도 UCC공모전’ 등이 그것인데, 이런 공모전은 주제 자체가 현대사와 관련이 있어, 우리 삶과 직결된 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높힐 뿐만 아니라 잘 되면 수상의 영예까지 안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6. 수업일기 쓰기

교사들은 대부분 수업을 하면서 내용이 정교해지고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내년에 꼭 써야지...’하면서도 금새 잊고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이럴 땐 수업진도를 엑셀로 정리하고 수업일기를 쓰는 습관을 들여두면 다음해의 수업에 내실을 기하고 나름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원종혁샘은 역사교사모임 홈피에 자신의 수업일기를 계속 연재중이시다.


현대사를 왜 배워야 하는가

강의를 막바지에 던지는 질문이었다. 강연주체측에서 먼저 제안한 예시 질문이었다고 한다.

‘4․19를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행복한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대사인 민주화운동을 왜 배워야 하는가. 민주화는 무엇인가.’


“민주화운동은 인간사에 있어 순리이고 자연의 이치입니다다. 누군가 나의 삶을 억압한다면 그대로 억울린 채 사는 것이 아니라 그에 저항해서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런 수업을 들으면 행복할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뭔가 꿈꾸는게 있어서 떨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꿈꾸면서 떨쳐 일어났던 꿈은 좌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고 남은 꿈, 과제가 있다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을 것이고 미래에 우리가 담당할 역할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교육에 대한 꾸준하고 잔잔한 열정과 헌신을 엿볼 수 있는 원종혁 샘의 강연은 간디고등학교의 목표로 마무리되었다.


가르친다는 것은 꿈꾸는 것이고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 강연  아이들과 현대사 수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수송초등학교에 근무하시는 배성호 선생님께서 첫날 마지막 강연을 이어가셨다.

 

초등학교에선 6학년 사회가 모든 교사에게 가장 큰 부담이라고 한다. 6학년 1학기 동안 한국사 전체가 다루어지는데, 일제고사 실시 전만 해도 교사가 교재를 재구성해서 자유로운 수업이 가능했던 반면, 일제고사 실시 후에는 시험 결과에 대한 압박으로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한다.

 배성호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림책을 여러 권 들고 나오셔서 문학과 역사가 만나는 시점에서 보다 풍성한 수업이 전개될 수 있음을 여러 사례를 들어보여주셨다.

 강연을 듣고나서 초등학교 뿐만 아니라 중학교 현장에서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겠다 싶어 집에 오자 마자 <고릴라 왕과 대포>, <해를 삼킨 아이들>,<역사가 흐르는 한강> 등을 주문했다.

 초등학생들의 순박한 웃음을 빼다박은 배성호샘의 수업 사례를 들어본다.


수업은 예술적 행위

전통적 교과서관에 따르면 수업은 라는 행동주의적 방식에 따라 교사는 수동적인 대리인에 머물지만, 진정한 수업은 학생과 교사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예술적으로 창조된다. 그래서 아이즈너는 <교육적 상상력>에서 가르치는 일은 높은 기술과 사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그 경험은 예술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되는 현대사 수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책으로 여는 현대사 수업

 

현대사 수업에 영감을 준 것은 예전부터 교류를 해오고 있는 일본 교사들이었다.

연세가 90쯤 된 히로시마 교직원 조합샘들은 직접 만든 그림책 <다미짱의 긴 밤> 을 들고

일본 도서관을 돌면서 이 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활동을 하신다고 한다.

초등학생들을 위한 그림책이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악의 평범성’을 읽을 수 있다.

나찌치하의 한 군인은 ‘난 그저 군인으로서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라는말로 자신이 행한 과오에 대해 변명을 했다. 그 평범한 삶의 방식이 인류를 송두리째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도 한다.

 <다미짱의 긴 밤> 은 일제감정기 하에서 한국인 강제징집을 맡았던 할아버지의 참회하는 삶에 대해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이 책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면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언어에서 자유로운 아이들은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이야기를 엮어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현대사로 접어든다. 초등학교의 경우 6학년 1학기에 한국사 전체가 다루어지는데, 책을 통해 사회를 중심으로 국어과목과 통합 수업을 진행한다. 아이들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림책을 통해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가고  또 그것을 오랫동안 기억한다. 초등학교에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 외에 학생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지식채널e의 상영과 함께 강풀의 만화 <26년>이나 <해를 삼킨 아이들>을 통해 5월 광주를 , <고릴라 왕과 대포>를 통해 평화를 이야기 한다.


신문을 통한 현대사 수업

 프랑스의 경우 4학년때부터 미디어 비평교육이 시행되는데 반에 우리는 상대적으로 미디어비평교육이 전무한 실정이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배성호샘의 미디어비평교육은 이렇다.

 학기초 신문을 보는 가정을 조사해 각기 다른 신문을 가져오게 한 뒤 각 신문의 1면 사진과 만평, 그리고 사설을 비교하게 한다. 1면에 실린 사진은 어느 방향에서 찍었는가에 따라 그 논조가 달라진다. 참고로  ‘민주언론시민연합’ 사이트에서는 ‘이달의 좋은 사설’과 ‘이달의 나쁜사설’을 게재한다. 이곳의 자료를 활용하는 것도 자료찾기의 수고를 더는 한 방법이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배성호샘의 강연은 ‘희망’을 이야기 하며 끝을 맺었다.

  “ 한반도가 완전히 초토화 됐던 한국 전쟁 당시 영국 런던의 타임스지(紙)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또 혹자는 ‘민주주의는  GNP가 $ 5,000~6,000  이상이어야 가능하다’고도 했는데, 우리나라는 1960년 상황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교육은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남산, 굴욕과 억압의 역사를 한몸에 휘감고 서다


4월을 꽁꽁 얼렸던 봄날씨가 25일 아침엔 선심을 베풀어 맑고 따스한 기운을 선사했다. 그러나 우리가 묵었던 남산 유스호스텔 역사를 되짚어 보노라면 결코 이곳은 여행객이 편안하게 묵을 낭만적인 숙박지는 아니었다.

 

 

  

1899년 주한공사로 부임해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던 하야시 곤스케 동상 받침대의 일부가 통감부터에 남아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던 이완용과 일본 데라우찌 마사다께 총독은 데라우찌의 침실에서 계약을 맺는다. 우리나라의 운명이 결정짓는 장소가 일제 총독의 침실이었고 잠옷바람이었다. 이것은 다소 의도적인 연출로 보여진다고 한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8월 29일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었다는 소식을 공표한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식민지 조선역사가 35년간 시작된다.

 오욕의 역사를 만들어낸 데라우찌 통감 관저의 위치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지만 표지석을 통해 알 수 있는 통감부터는 서울시 예장동 2-1번지로 현재는 애니메이션 센터가 들어서 있다. 그나마 통감부 관저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게 된 것은 당시 찍은 사진자료에 나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덕분이다. 서해성교수님 사진의 왼편 아래로 내려가면 400년 넘게 오랜 세파에 시달렸을 은행나무가 범상치 않은 자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은행나무 근처엔 당시 통감부 관저 건물 앞뜰에 세워졌다는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받침대 판석 3점이 시민의 벤취 용도로 자리잡고 있어 당시의 역사의 흔적을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일한병합이 되면서 한국통감은 조선총독으로 격상된다. ‘왜성대 총독관저’로 불리던 이곳은  1939년 제7대 총독때부터 현재의 청와대 관저로 옮기면서 ‘시정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렇다면 남산은 어떤 곳인가.

목멱산으로 불리웠던 남산은 예부터 봄,가을에 초제를 지내던 인격화된 산이었다. 때문에 남산엔 무덤이 없다. 통감부가 위치한 자리는 조선 역대 왕의 신위가 모셔진 종묘를 정남에서 마주보이고는 자리이며, 궁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출입조차 제한된 곳이었다. 그런 곳에 통감부 관저를 지었다는 것 자체가 다분히 대한제국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하겠다.

 

 남산 굴욕의 역사는 1960년을 거치면서 억압의 탈을 쓴다.

1961년 쿠데타이후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만든다. 그는 ‘내가 혁명을 한 것은 중앙정보부를 만들기 위해서였고 나는 그 책임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정도로 권력위의 권력, 감시위의 감시 기관을 이미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묵었던 남산 유스호스텔은 바로 중앙정보부를 이어 받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건물 본관이었다. 안기부가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내곡동으로 옮겨진 뒤 서울시가 이곳 건물 27동중 23동을 해체하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본관(서울유스호스텔)

유스호스텔은 과거 국가안전기획부 본부였다. 영문자 HOSTEL 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곳은 안기부장의 사무실이 있었다.

과 별관, 체육관, 지하벙커 4동이다. 체육관은 일반시민들에게 개방되어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별관은 안기부에 끌려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던 곳으로 지금은 도시철도공사 연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본관 맞은편에 지하로 연결되어있는 지하벙커는 지금은 종합방재센터의 상황실이 들어서 있는데 원래는 지하 대피시설로 본관과는 지하통로로 직접 연결되어 있고, 경범을 수사하거나 유치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다 시피 본관은 6층이며 당시 6층 오른편엔 안기부장의 사무실이 있었고 전(前)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낙사했다고 알려진 장소 역시 이곳 건물 옥상이다.

 안기부 하면 떠오르는 고문이 행해지던 취조실은 지하 3층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곳은 유스호스텔로 개조되어 공개되었지만 고문실로 행해지던 지하 3층은 지금도 개방을 하지 않는다.

  2009년 서울시는 ‘남산 르네상스’프로젝트를 통해 “생태․역사성의 지속적인 회복(回復)과 시민과의 소통(疏通)을 통한 새로운 남산 자락문화의 창조”라는 미래비전 아래 서울의 상징인 남산의 브랜드화를 추진한다고 한다. 서울시가 남산의 역사성을 기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하니, 부디 다음과 같은 시민단체의 목소리에도 꼭 귀기울이기를 바란다.


옛 안기부 건물 지하를 공개하라.

그리고 이 건물을 유지하라.


우리의 현대사를 생생하게 보고 싶거든 남산에 오르라. 남산을 알면 일제 강점기를 이해하고 분다과 독재의 역사를 한꺼번에 길어 올릴 수 있으니.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표상 이회영․이시영

화창한 날씨덕분에 이야기거리가 풍성해져 아침 강연이 길어지면서 조금 늦게 명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차들이 비좁게 오가는 명동 한 거리

에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라고 씌여진 비석이 옆으로 서 있다.

 이회영과 이시영. 이항복(李恒福)의 11대 후손으로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가의 후손이다. 우리는 나라가 망할 때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를 그들에게서 본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려 하자 우당 이회영은 이동녕, 이상설 등과 함께 상소를 올리며 격렬하게 항의한다. 그러나 일부 대신들에 의해 이 조약을 체결되었고 당시 외교 교섭국장이었던 아우 이시영은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일한병합 소식이 전해지자 우당 이회영의 가족들은 가산을 황급히 정리하여 마련한 40만냥을 싣고 망명을 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한다. 이곳은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로 10년간 약 3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무장 독립 운동을 이끄는 핵심이 된다.

 녹봉을 받은 관리라면 나라가 망했을 때 죽거나 그것을 돌려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던 이회영은 재산과 목숨을 바쳐 독립 운동에 매달렸고 다른 형제들은 결국 굶어서 죽었다.

 여기서 한가지 에피소드. 이회영은 만주로 망명을 떠나면서 가지고 갈 수 없었던 무수히 많은 책들을 뜻깊에 물려주기 위해 인재를 찾아나선다. 그때 찾은 인재가 최남선이다. 우리는 뛰어난 인재로 여겨지던 이가 고귀한 사명따위는 헌신짝 내던지듯 버리고 입신 영달에 눈멀어 종국엔 진흙속에 묻혀가는 걸 종종 보게 될 때가 있다. 최남선이 그렇다.

 

민주화 운동의 메카, 명동성당?

 

거룩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한국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추앙받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천주교는 선교사가 오기 전 남인 계열의 학자들이 이를 수용하는 독특한 역사를 지녔으나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명동성단 신학교에 다니던 학생을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시키기도 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도마 안중근 의사를 일컬어 ‘살인자는 천주교 신자일 수 없다’며 외면하기도 했다.

 천주교가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1) 1975년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 거부운동’에 이어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세웅 신부등이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본산지가 된다.

 그리고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 규탄 범국민대회’에서 촉발된 명동성당사태는 시민과 학생등 6백여명의 집단 농성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6월 항쟁을 촉발시킨다.

사진속 차들이 주차되어 있던 곳이 당시 시민들이 농성을 했던 장소이며 성당건물과 이웃해 있는 계성여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도시락을 전달하며 이들을 응원했다.

 약한자들의 피난처요 은신처로 기억되던 이곳도 1995년 한국통신 노조의 천막 농성 퇴거 요청과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점차 보수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긴 성당이 위대했던 것이 아니라 시민이 위대했었다는 사실을 우린 잠시 망각하곤 한다. 우아하고 기품있는 르네상스 건물에 잠시 현혹되어서.

 

 

 우리가 기념해야할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

점심을 먹고 향한 곳은 혼자서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좁은 골목에 위치한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이다.

용산이 아니더라도 수명이 다 된 탱크나 헬리콥터 두 어대를 올려놓고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은 지방의 중소도시에서도 가끔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전쟁을 기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한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전쟁기념관>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살려 와신상담하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살포한다. 전쟁의 잔혹함, 포악성을 안다면 우리는 전쟁을 기념해야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야할텐데도 말이다.

 <평화박물관>은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와 사죄운동을 위해 만든 ‘베트남전진실위원회’를 전신으로 하고 있다. 2000년 여름, 베트남전진실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문명금 할머니께서 전쟁 피해자들을 위해 써달라라고 정착지원금으로 받은 4,300만원을 기탁해오면서 평화박물관 건립 논의가 시작되었다. 처음 진실위원회가 평화박물관의 위치로 생각한 곳은 베트남이었으나, 많은 고민과 검토를 거쳐 평화박물관이 피룡한 곳은 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현재 반성과 사죄, 성찰의 공간으로 오밀조밀하게 태어나고 있다. 다소 늦은감이 있지만 평화교육 준비를 해 나가는 평화교육센터로서 평화박물관이 커지고 세지기를 기원해본다.


1박 2일 연수 여정의 마지막은 서대문 형무소이다.


일제의 잔혹성만 고발하는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 방문은 이번에 세 번째이다. 처음 이곳을 방문할 때만 해도 다른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는데, 형무소만큼은 건물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오뉴월에도 온몸에 한기를 돋게 하는 옥사의 냉기에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1908년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신축된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까지 사용되었음에도 역사관에는 1945년까지의 역사만 잘 보존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수감 장소 내지 사형 장소였다면 해방 이후엔 조봉암 선생과 75년 인혁당 사건 피의자들이 사형선고 하루만에 사법살인을 당한 곳도 이곳이다. 그러나 추모비어디에도 그들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땅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서대문형무소라는 걸 여기서 알 수 있다.

  우리가 방문하던 날 서대문형무소는 개보수 작업을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국적불명의 건물모양새로 비난의 여론이 높았던 유관순열사 기념관도 제 모습을 찾을 모양이고 취사장과 수감자들이 운동을 했던 격벽장도 옛 모습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찾아야할 것들은 빠뜨린 체 외양만 치장하는 것 같아 돌아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1박 2일 연수, 그러나 잠들지 못한 안기부에서의 하룻밤


설거지를 하다가 ,무심히 걷다가 요사이 문득 문득 떠오르는 싯귀가 있다.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 의미를 지니리라.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그때 우리나라에선 한권의 시집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우리나라 처럼 시집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드믄일인데다, 당시는 올림픽으로 전국이 들썩이던 때였음에도 사람들은 소설이 아닌 시집을 손에 들었고 그 시들을 읊조렸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 의미를 지니는 걸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강연을 통해서, 연수를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깨우칠 때마다 적어도 교사는 교단을 떠나는그날까지 배움의 끈을 놓치면 안되겠구나, 그것은 직무유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며 사는 것보다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이 현재의 나에겐 더 큰 삶에 의미를 지니노라고 주장한다.




1) 내용의 일부는 <명동성당, 21세기에도 ’민주화의 성지일까> 2005.01.25 오마이뉴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