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플라톤 `향연` / 고전 읽으면 논술이 술술 <7-1.2.3.4>

https://dia-na.tistory.com 2015. 11. 19. 16:34

.

 

 

 

고전 읽으면 논술이 술술 <7-1> 플라톤 `향연`

플라톤의 참다운 사랑과 `향연`을 통한 가르침의 방식은

 

◆ 주요의제

① 플라톤과 '향연'의 주제

② '향연'의 무대 설정과 등장인물 및 시대 배경

③ '향연'의 구성 및 서막

 

◆ 핵심용어

▶아름다움(Kalon) = 오늘날 우리는 아름다움은 미학과, 좋은 것은 윤리학과, 그리고 참된 것은 인식론과 관계하는 말마디로 여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에서는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 그리고 참된 것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따라서 플라톤에 있어서 아름다움으로 상승하는 것은 동시에 최고 좋은 것으로 상승하는 것이기도 하고, 최고 참된 것으로 상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성애와 교육 = 대화편에 따르면 이성적 사랑은 자녀 생산만을 위한 순수 생물학적인 충동에 기인하는 열등한 사랑인 반면 동성애는 인간의 높고 고귀한 열정에 비롯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플라톤의 고유한 생각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관행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의 도덕적 코드는 우리와 달랐다. 그들이 생각하는 동성애는 교육과 관계된다. 남자 애들은 결코 여성으로부터 교육을 받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엄마로부터의 교육은 절대로 안 된다. 심지어 아버지로부터의 교육도 안 된다. 모범이 되는 나이 많은 사람이 청년(16~18세)을 가르쳐야 한다. 이때 선생이 사랑하는 청년을 선택한다. 따라서 선생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젊은이는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 물론 이들의 성적 사랑은 주로 상체를 만지는 것에 국한되었다.

이런 관계가 소크라테스의 경우 역전되어, 소크라테스가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젊은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플라톤은 '법률'편에서 동성애가 본성에 위배된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동성애에 대한 선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동성애만이 정신적 창조력을 고양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제라르 남작이 그린 천상의 꿈을 꾸는 듯한 '프시케와 에로스'.

 

 

1. 플라톤은 어떤 사람인가?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347년경에 80세의 나이로 숨졌다. 플라톤은 명문 정치인 집안의 출신이다. 플라톤은 그의 출신 성분으로 미루어 볼 때, 정치적 경력에 입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크라테스의 영향 그리고 친척들로 구성된 과두정의 실정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환멸 또한 소크라테스의 고발과 죽음을 초래한 아테네 민주 정치에 대한 절망 등으로 인해 인간의 교육에 있어, 특히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교육에 있어 근본적 변화가 초래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철학자가 도시 국가의 왕이 되든지 또는 왕이나 통치자라 불리는 자가 진지하고도 적절하게 철학 교육을 받든지 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도시 국가의 악뿐만 아니라, 인류의 악도 끝날 수 없다"('국가')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목숨을 담보로 현실 정치에 뛰어 들기보다는 인간 교육에 몸을 바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그는 40세가 되던 해, 시칠리아(아르키타스를 통해 시라쿠스 군주 디오니시우스 1세를 만나 이상 정치를 펼 것을 권유한다)와 이탈리아(그는 이탈리아에서 그의 후기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을 만났으며 특히 아르키타스와 친구로 지낸다)로의 최초 여행 후, 도시 국가의 미래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아테네에 아카데미라는 학교를 열게 된다. 이 학교는 그 이후 10세기 동안 지탱된다. 플라톤은 학교 건립 후, 시라쿠스의 디오니시우스 2세를 만나 자신의 정치 이념을 현실화하기 위해 시칠리로의 두 차례의 여행을 제외하면, 줄곧 학교를 운영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다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플라톤의 작품과 '향연'

 

플라톤의 이름으로 내려오는 대화편은 36편이다. 그 중 위작이라 여겨지는 것을 빼면 대개 28편 가량 된다. 이들 작품들은 초기 대화편, 과도기 대화편, 중기 대화편, 후기 대화편 등 4개 그룹으로 나뉜다.

플라톤이 42세 전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향연'을 비롯하여 '메논', '파이돈' 등이 과도기 대화편에 속한다. 과도기 대화편에 비로소 이데아론의 기본 이론이 형성된다.

'메논'에서 '수학을 배우지 못한 노예가 어떻게 수학 문제를 푸는가'라는 대화를 단서로 상기(想起)에 대한 논의를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데아에 대한 구상은 '파이돈'과 '향연'에서이다. 전자에서는 영혼 불멸에 대한 증명이 행해지고, 후자에서는 에로스 이론이 전개된다.

 

 

소크라테스의 못 생긴 흉상

 

 

3. '향연'의 주제

 

에로스는 우리말로 사랑이지만,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 형제자매 사이의 사랑 또는 조국에 대한 사랑을 뜻하지 않는다. 에로스는 식욕과 승리에 대한 대단히 강한 욕망을 뜻하지만, 대개는 성적 사랑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오늘날 성적 사랑이라 하면 남녀 관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당시의 성적 사랑은 동성애를 뜻한다. 원래 이러한 뜻을 가진 에로스라는 요어를 플라톤은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에로스를 성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추구하는 다양한 욕구를 뜻하는 말로 확대했다.

'국가'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추구하는 욕구에 따라 다른 인간이 된다.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철학자가 되고,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군인이 되고,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상인이 된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참다운 사랑은 무엇일까? 하는 것 등을 소크라테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향연'의 주제이다.

 

소크라테스는 에로스를 신격화하여 찬양하는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고 난 다음 말문을 연다.

에로스는 인간들이 찬양하는 신이 아니라, 아름다움은 추구하는 주체적 욕구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아름다움을 갑자기 맛보아서 아름다움에 압도된 사람을 지칭한다. 그래서 에로스는 인간과 신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뱃사공이다.

그는 언제나 결핍되어 있고 곤궁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로 가득하다. 이런 의미에서 에로스는 철학자이다. 그는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갈망하도록 만드는 자이다. 그렇다면 '플라토닉 러브'의 본래 뜻은 남녀 사이의 정신적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를 갈망하는 철학적 사랑일 수밖에 없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성적 사랑이 사랑의 전부일까?

플라톤은 성적 사랑은 어차피 계산된 사랑일 수밖에 없는 까닭에 '나쁜 사랑'이라고 한다. 오히려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본래적 의미의 사랑이 아닐까? 그래서 플라톤은 후자를 '좋은 사랑'이라고 한다.('파이드로스')

 

 

4. '향연'의 무대 설정과 등장인물

 

'향연'은 직접 대화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전달된 대화 내용을 플라톤이 자신의 의도대로 새로 각색한 책이다. 이 저서는 대개 기원전 385년경에 씌어졌다고 추정된다. 이때 플라톤의 나이는 42세 전후이다. 그리고 이 저서에 등장하고 있는 실제적 향연은 기원전 416년에 있었다. 이때 플라톤의 나이는 11살이다. 그리고 실제로 파티에 참석했던 아리스티데모스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아폴로도로스가 이 대화 내용을 전달한 시점은 기원전 4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논의가 '향연'의 〈들어가는 말〉의 내용을 이룬다.

플라톤이 이런 논의로 서두를 시작하는 까닭은 그의 대화편에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함이다.

 

'향연'이라 일컬어지는 드라마는 4일에 걸쳐 일어난 사건과 관계된다.

첫날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기념으로 행한 비극 경연대회에서 아가톤이 우승한 날,

둘째 날은 디오니소스를 숭배하기 위한 제물 봉헌 및 집단적 음주,

셋째 날은 아가톤의 집안에서 있었던 축하연, 넷째 날은 모두가 잠들고 난 다음 새벽에 소크라테스가 죽을 인간들의 잔해에서 살아난 신처럼 일어나 뤼케이온에서 세수하는 광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아리스티데모스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전달자는 아폴로도로스이다.

 

등장인물은 아폴로도로스, 아리스티데모스,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수사학자), 아리스토파네스(유명한 희극 작가), 에릭시마코스(의사) 아가톤(비극 작가), 소크라테스, 디오티마(만티네이아 출신의 전설적인 여사제로서 소크라테스의 스승), 알키비아데스(소크라테스의 제자) 등이다. '향연'의 대화가 실제로 벌어졌던 기원전 416년, 젊고 야심만만한 인물들인 이들 중 대부분은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던 사람들이었고, 기원전 404년인 과두 독재 정치에 가담해 정의롭지 못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소환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특히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최초의 고발인"이였다.('소크라테스의 변론')

 

이들은 플라톤이 기원전 385년경에 '향연'을 쓸 때, 이미 죽고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말로 대체로 비참했다. 아가톤은 과두정권이 무너지고 난 다음, 민주정권을 피하여 악명 높은 아르케라오스에게로 도망간다. 알키비아데스는 반역자로 낙인찍힌다. 파이드로스와 에릭시마코스는 유배된다. 이들 유능한 귀족 젊은이들은 그들을 위대성으로 가져갔을 수도 있었던 그 힘과 능력 때문에 파멸되었다. 아마도 플라톤은 아테네의 유능한 젊은 귀족들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인간이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고뇌했을 것이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올바른 인간을 바탕으로 하여 아테네의 재탄생을 염원했을 것이다.

 

 

5. '향연'의 구성

 

'향연'은 일곱 가지 이야기를 그룹으로 나누어 3부분으로 나눈다.

①다섯 가지 이야기는 에로스에 대한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릭시마코스, 아리스토파네스, 아가톤 등의 연설이다. 이들의 논의는 대화가 아니라 연설이며, 철학적이기보다는 수사학적이다. 내용은 주로 에로스에 대한 찬사와 그 효능에 대한 이야기이다.

② 소크라테스의 대화: 그는 아가톤과의 대화를 통해 아가톤이 진리를 말하기보다는 설득력 있는 수사를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에로스의 본성과 그 효능에 대해 논한다.

③ 알키비아데스의 연설: 에로스에 대해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에 대해 칭송을 늘어놓는다. 여기서 에로스의 구체적 화신이 소크라테스임이 드러난다.

 

첫째 그룹의 다섯 이야기는 '억견'(doxa)에 해당한다. 억견은 사실과 무관한 상상이나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적인 소신 및 여론을 뜻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망아적(忘我的)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참된 '인식'이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의 마지막 이야기 역시 '억견'이다. 하지만 이 경우의 '억견'은 대단히 반어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가운데서 이따금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첫째 그룹의 이야기는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와 비극 작가 아가톤을 등장시킴으로써 참되지 못한 희극과 비극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참다운 의미에서의 희극과 비극의 통일임을 드러내고 있다.(223d 참조)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참된 희극과 비극은 참된 인식에 바탕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6.서막(174a.3-178a.4): 아가톤 저택에서 열린 향연

 

아리스토데모스는 아가톤이 비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축하하러 가는 소크라테스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 그의 권유로 축하연에 동행한다. 아리스토데모스는 소크라테스가 길을 가다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고 이웃집 처마 밑에 홀로 머물러 있는 것도 모르고, 먼저 아가톤의 집에 도착한다. 그 후 소크라테스는 한 시간 늦게 아가톤 집에 도착하지만, 아무도 의아해 하지 않는다. 그는 자주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아가톤은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옆에 앉게 한다. 그리고 길 도중에 떠올랐던 지혜로운 생각을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지혜는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답한다. 실로 그 자신은 어떠한 지혜도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아가톤의 지혜가 빛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화편의 중간에 이르면 이런 관계는 역전된다.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들은 진리를 논하지 않는다. 그들은 피상적이다. 그들은 파우사니아스의 제안에 따라 사랑의 신 에로스에 대해서 가장 훌륭하게 말해보자고 제안한다. 이에 모두 찬성하고 순번에 따라 파이드로스가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말문을 연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관심을 갖고 있는 지혜는 삶은 바꾸는 것과 관계하는 지혜이지, 전달될 수 있는 지혜는 아니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스스로 지혜를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의 방식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향연'의 놀이마당이 전개된다.

 

▶생각해볼 문제

 

① 이성간의 사랑은 상호 독점적 배타성을 전제로 한 사랑이다. 따라서 남녀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애(自己愛)에 바탕 한다. 자기애 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대가성 없이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②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한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아무런 경험 없이도, 그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은 아름다움을 잠시나마 경험했다는 말이다. 당신은 시 음악 회화 조각 고전 등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③ 과학은 분과학(分科學)의 준말이다. 따라서 과학은 특별한 분야에 한정되어 그 분야에 대한 '지식'만을 연구하는 학문 영역을 뜻한다. 과학은 분야 따라 크게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으로 나누어진다. 그렇다면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은 분과학이 아니다. 철학은 특정 분야를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또 지혜란 무엇일까?

 

 

 

 

 

고전 읽으면 논술이 술술 <7-2> 플라톤 '향연'

 

향연의 첫째 놀이마당- 에로스에 대한 비철학적인 5개 견해는

 

◆ 주요의제

 

① 참다운 사랑은 수치심과 명예심을 불러일으킨다.

② 참다운 사랑은 여성보다 이성적인 남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③ 참다운 사랑은 모든 만물의 조화 원리이다.

④ 참다운 사랑은 인간의 원초적 합일 상태의 회복이다.

 

 

◆ 핵심용어

 

▶억견(doxa)과 인식(episteme) = 억견은 있지도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나, 사물이나 사태를 단순히 감각적 경험을 통해 아는 수준의 지식을 말한다. 따라서 억지 주장이나 개인적 신념이나 사회적 여론 등이 역견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인식은 일차적으로 기하학으로 대변되는 수학적 지식을 뜻한다. 여기서 인식은 감각적 경험을 떠나 사물의 본질을 사유한다. 곧, 삼각형의 본질 등을 사유한다. 아무리 탁월한 개라도 수학자인 개는 없다. 수학적 인식은 인간에만 고유한 사유이다.

하지만 수학은 공리에 의존한다. 공리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전제하고 있는 지식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참된 인식은 아무 것도 전제하고 있지 않는 무전제지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고 통합하고 있는 일자(一者)에 대한 지식이 바로 무전제이다. 일자를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라 부른다.

'향연'에서 인간은 단순히 일자로 향해가는 영혼의 순례자가 아니라, 일자 자체를 경험하는 하는 자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곳에 항구적으로 머물 수 없어 다시 아래로 돌아온다. 그래서 신(神)의 지식(sophia)과 친구하고 싶어 하는(philo) 사람을 철학자(philosopher)라 부른다.

 

▶원초적 상태의 회복과 관조(theoria) = 일자를 보는 것을 theoria라 한다. 오늘날까지도 theoria의 어원을 thea(관조)+horan(유지하다. 보다)으로 여기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theoria의 원래의 의미는 theos(신)+horan(유지하다)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theoria는 신의 의지와 명령을 지키며 유지하는 것이다. 원래 하나였는데 분리되고 만, 신과의 공동체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다. 이런 복원은 일자를 다시 경험하여 영혼 가운데 되살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전에 갖고 있었던 신적 지식을 떠올리는 상기(想起)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초적 합일 상태로의 복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제 에로스를 찬미하는 일곱 가지 이야기 가운데 억견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실제로 이들이 행한 이야기가 아니라, 플라톤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들이다. 플라톤이 이런 이야기를 채택해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는 철학적 의도는 다음과 같다. ① 에로스에 대한 논의는 여태까지 시인과 소피스트들이 무시해온 주제이다. ② 명성보다는 사태 자체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177a-178a). 후에 소크라테스는 에로스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에로스에 관한 일을 이야기한다. 시가(詩歌)와 로고스의 대결이 예상된다. 먼저 명성이 자자한 사람의 이야기를 열거하고, 로고스에 따라 이에 답변하는 것이 바로 문답법이 아니겠는가.

 

 

 

아리스토파네스 흉상

 

 

1) 수치심과 명예심을 불러일으키는 에로스: 파이드로스(178a - 180b)

 

첫째, 그는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에 따라 사랑의 신인 에로스를 찬양하는 것으로 말문을 연다. 에로스는 위대한 신이고 인간들과 신들에게 모두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신이다. 그 까닭은 가장 오랜 신이기 때문이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카오스가 제일 먼저 생겨났고, 그 다음에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이어서 에로스가 생겨났다. 둘째, 그는 에로스의 효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결한 연인을 갖는 것 그리고 그 연인의 사랑을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비겁한 행위가 연인에게 보일 때, 가장 수치스러울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명예(time)를 사랑하게 함으로써 사회적인 결속력을 형성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랑은 물론 동성애이다. 그는 군대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으로 구성된다면, 가장 강한 군대가 될 것이라 한다. 사랑의 효능에 대한 이야기는 소크라테스도 인정하고 있다(208d).

 

 

2) 참다운 사랑은 여성보다 이성적인 남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파우사니아스(180c-185c)

 

파이드로스는 그냥 에로스를 찬양했지만, 실은 사랑의 신인 에로스는 둘이다. 천상의 에로스와 통속적 에로스가 그것이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아프로디테는 둘이다. 하나는 어머니 없이 우라노스가 직접 낳은 딸인 우라니아라 불리는 천상의 아프로디테이고, 다른 하나는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 판데모스라 불리는 세속적 아프디테이다.

사랑 자체는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아니다. 올바르게 행해지면 아름다운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추한 사랑이 된다. 이성 간의 사랑은 통속적 에로스이며 추한 사랑이다. 추한 사랑은 소년들보다 여자를 사랑하고 영혼보다는 육체를 사랑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육체적 사랑이라는 목표만을 추구한다.

반면에, 천상의 에로스는 여성적 요소는 없고 남성적 요소만을 갖고 있어 소년을 사랑한다. 격정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사랑이어서 본성상 더 강인하고, 이성적 요소를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성적인 남성에게 마음이 향한다. 이들은 이성을 갖기 시작한 소년들을 사랑하여 전 생애 동안 소년과 함께 지낼 준비가 되어 있다. 이는 아름다운 사랑이다. 젊은이를 말로 설득하고, 지혜를 추구하게 하고, 신체적 훈련을 시키는 일 등의 그리스의 관습은 고귀하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성인)과 사랑받는 사람(소년)이 각각의 도리를 지키면서 지혜와 그 밖의 탁월성(arete)만을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때, 도덕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파우사니아스의 논의의 특징은 윤리적 차원은 일단 무시하고 아테네의 관습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는 디오티마의 가르침에 한 걸음 접근하고 있다. 디오티마의 연설에서 에로스의 가치는 그가 향하는 대상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육체적인 사랑과 함께 정신적 사랑을 중요시 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향연에 참석하여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

 

 

3) 참다운 사랑은 모든 만물의 조화의 원리: 에릭시마코스(185e-188e)

 

에릭시마코스는 파우사니아스가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 점에서는 옳지만 제대로 논의를 완성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참다운 사랑은 남자와 남자 사이 그리고 남녀 사이의 감성 우정 매료 등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 적용되는 우주적 원리라고 한다. 사랑은 대립되는 성질(차가움과 뜨거움, 쓰디씀과 달콤함, 건조함, 음습함)을 끌어당겨 결합 통일시키는 우주적 힘이다. 그는 이런 통합의 원리를 좋은 에로스로, 대립과 투쟁의 원리를 나쁜 에로스로 상정하고 있다. 예컨대 건강은 좋은 에로스 덕분에 대립적인 것이 조화롭게 통합될 때 생기는 것이고, 질병 및 모든 나쁜 것은 대립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과도하게 흘러넘칠 때, 곧 나쁜 에로스가 지배할 때, 발생한다. 좋은 것은 대립적인 것이 조화될 때이고, 나쁜 것은 유사한 것끼리 뭉치는 것이다. 그는 자연 과학자로서 의학이나 물리적인 사실을 과도하게 일반화시켜 모든 것에 확대 적용하는 과학자의 전형으로 플라톤에 의해 소개되고 있다. 그에게는 윤리적 차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4) 참다운 사랑은 인간의 원초적 합일 상태의 회복: 아리스토파네스(189a - 193d)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대립적인 것의 조화가 사랑이라는 에릭시마코스의 논의는 당치도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유사한 것끼리의 결합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능력을 제대로 알기 위해 인간의 본성과 그것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먼 옛날 인간의 본성은 오늘날의 것과 다르다. 원래 세 가지 성(性)이 있었다. 곧, 남성-남성, 여성-여성 그리고 자웅동성(雌雄同性)이 있었다. 이들은 대단한 힘과 능력에다가 오만함까지 갖고 있어 신들을 공격하게 된다. 신들은 인간들로부터의 제사와 공물을 받아먹을 수 없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인간들을 죽일 수 없었다. 제우는 인간의 힘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공물을 바치는 인간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둘로 나누게 된다. 또한 만약 계속 불손하게 굴고 소요를 일으키면, 또 다시 둘로 나누어 외발로 뛰어 다니겠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제우스는 아폴론에게 양분된 사람들의 얼굴과 목의 반을 잘려나간 쪽을 돌려놓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잘려나간 부분을 오늘날 배로 불리는 부분으로 당겨서 염낭을 묶듯이 묶었다. 그 묶은 지점이 바로 배꼽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래 상태가 둘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각각은 자신의 또 다른 반쪽을 갈망하고 그것과의 합일을 원하게 되었다. 에로스는 바로 원초적인 합일로의 복귀에 대한 동경이다.

그런데 원초적 합일은 세 가지로 나눠진다.

① 양성자웅, 곧 남여 혼합적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남자가 된 사람들은 여자를 매우 좋아하며 많은 경우 색광이 된다. 이로부터 분리된 여자는 남자를 밝히고, 간통죄를 주로 저지르는 여성이 된다.

② 순전히 여성적인 존재가 나뉘어 반쪽이 된 여성들은 레즈비언이 된다.

③ 순전히 남성적인 존재가 나눠져 반편이 된 남자들은 남자들만 따라 다닌다. 그들은 소년시절부터 성인 남자를 사랑하고 그들과 동침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기도 한다. 이들이야말로 가장 남성다운 자들이기에, 청소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다. 이들 소년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국가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

 

하지만 플라톤은 "좋은 것이 아닐 경우 자신의 반쪽뿐만 아니고 자신의 전체조차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자기 반쪽을 사랑하는 자만이 제대로 사랑을 할 줄 아는 자라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견해를 명백하게 반대하고 있다(205d-e). 아리스토파네스에서 비극적으로 분할되었던 자기가 희극적으로 복원되는 것이 가능할까. 아리스토파테스는 신들에게 조신하게 굴지 않으면 다시 반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에로스신을 칭송하고 그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곧, 그의 사랑론은 종교적인 문제와 결합되고 있다. 이 입장은 플라톤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점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말미에 자신의 말을 도용했다고 소크라테스에게 항의하고 있다. 하지만 플라톤에서 인간의 원초적 분리의 극복은 단순히 자신의 반쪽 찾기에서가 아니라, 신체적인 것을 완전히 넘어서 있는 선의 이데아와 하나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막간극-소크라테스와 아가톤과의 대화(193d-194e): 소크라테스는 많은 관객 앞에서 작품을 당당하게 소개하던 아가톤의 달변에 비해 자신이 앞으로 할 이야기는 형편없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이에 아가톤은 다수의 무지한 사람보다 소수의 현자가 훨씬 더 두렵다고 답한다. 아가톤과 소크라테스 사이에 미묘한 대결 구조가 깔려 있다.

 

 

5) 에로스에 대한 미학적 찬양: 아가톤(195e-197e)

 

이때까지 에로스를 찬양만 해왔을 뿐, 그 찬양의 근거가 어떤 것인지가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에로스가 어떤 신인지를 밝히기 시작한다. 에로스는 신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신이다. 그 이유는 에로스가 신들 가운데 가장 젊은 까닭에 신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신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로스가 가장 늙은 신들 가운데 하나라는 파이드로스의 견해와 상반된다. 또한 에로스는 가볍고 미묘하다. 이는 그가 무르고 부드러운 심성과 영혼 속에 보금자리를 틀기 때문이다. 또한 에로스는 물과 같이 유연하다. 그래서 영혼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스며들어가고 빠져나온다. 또한 에로스는 모든 탁월성도 갖고 있다. 아무튼 에로스가 태어나고 난 후부터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이 신과 인간들에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어서 아가톤은 에로스의 훌륭한 행위들을 시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사랑의 신에 대한 칭송으로 들렸으면 좋겠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는다. 이러한 아가톤의 연설은 내용은 없지만, 대단히 수사학적이라서 참석자들로부터 열광적인 찬사를 듣는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연설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신에게도 잘 어울리는 연설"이었다고 한다(198a). 실제로 연설의 요점은 자기 과시였던 것이다. 자신과 신과의 동일시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에로스를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주장했다가 디오티마로부터 비난받았다는 말로써 은근히 아가톤을 나무라고 있다(201c). 이어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디오티마가 사랑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생각해볼 문제

 

1. 남녀 또는 동성 간의 사랑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에 따라 인간의 원초적 상태의 참다운 회복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런 원초적 회복은 당연히 정당화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이 참다운 사랑임을 주장하기 위해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도 되는 것일까?

 

2. 플라톤에 따르면 진리로의 길은 언어와 논리(대화)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진리의 목적지(일자)는 그것을 넘어서 있다. 언어의 길이 끊어져야(言語道斷)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경험할 수 있다. 언어와 논리만을 갖고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고전 읽으면 논술이 술술 <7-3> 플라톤 '향연'

향연 둘째마당 1막·2막 - 디오티마가 말하는 에로스의 철학적 개념은

 

▶주요 의제

 

① 에로스는 중간적 존재인 정령이다.

② 에로스의 부모 및 에로스와 철학자의 관계는?

③ 에로스는 좋은 것을 영원히 갖고자 하는 동경이다.

④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 가운데 생산과 출산 활동이다.

 

◆ 핵심용어

 

▶중간 존재: 낭만주의 철학자들은'향연'에서 에로스는 중간 존재라고 말할 때, 이 중간 존재라는 개념을 '중간에 서 있음'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그들에 따르면 철학은 무한한 것을 끝없이 동경하지만,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철학은 항상 길 도중에 그리고 길 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향연'에서 중간 존재인 에로스, 곧 철학자는 신들과 인간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뱃사공 또는 해석자로 묘사되고 있다. 철학자는 신적 지혜를 일시적이라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철학자는 도달한 것에 항구적으로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풍요로움과 빈곤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다.

뱃사공인 철학자는 신과 인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신의 것은 인간에게, 인간의 것은 신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정령 중의 하나인 에로스와 같다. 이와 같이 최종적 목적지에 잠시나마 도달할 수 있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는 철학자들은 플라톤뿐 아니라,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야콥 뵈메, 불교철학, 노자, 장자, 후기 하이데거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인간이 불완전하긴 하지만, 잠시나마 완전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진정한 시인은 신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이온'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에서 신으로 올라가는 길을 향수(享受)→상기(想憶)→황홀(恍惚)→입신(入神)으로,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오는 길을 신어(神語)→해석(解釋)→연주(演奏)→향수로 말하고 있다.

 

 

에로스, 곧 철학자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왔다갔다하는 뱃사공이다.

 

 

아가톤과의 예비적 고찰(198a-201c)에서 소크라테스는 대상의 참된 모습을 탐구하는 철학과 대상을 훌륭하게 꾸미는 수사학과의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 곧 그는 고르기아스에 버금가는 화려한 수사학적인 아가톤의 이야기에 이어 자신이 말할 수밖에 없음을 한탄한다. 자신은 어리석게도 참된 것만을 이야기하고, 참된 것 자체로부터 가장 훌륭한 것만 선택하여 논의 속에 적당하게 결합시키면 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연설은 찬양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대상의 본 모습은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그 대상을 거창하고, 훌륭하게 찬양하는 것만을 목표로 해왔다. 소크라테스는 이 때까지 찬사의 방식이 아닌 진리에 근거해 말하겠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어 아가톤과의 문답을 통해 그의 동의를 얻어낸다. 문답의 요지 다음과 같다.

 

①문)

에로스는 특정 대상에 대한 사랑인가 아닌가.

답) 분명 에로스는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다. 에로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욕구한다.

 

②문)

그렇다면 에로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욕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답)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대상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욕구하고 사랑한다.

 

③문)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인가. 추한 것에 대한 사랑인가.

답) 추한 것에 대한 사랑은 도대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에로스에게는 아름다운 것이 분명 결여되어 있다.

 

④문)

아름다움이 결여된 에로스를 아름답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답) 그렇게 말할 수 없다.

 

⑤문)

만약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다면, 에로스는 좋은 것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답)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뿐 아니라, 좋은 것도 결여하고 있다. 이어서 에로스의 본성·효능에 대해 거론된다.

 

 

2-1. 둘째 마당 제 1막-에로스의 본성

 

에로스는 중간적 존재인 정령(201d-203a.) : 소크라테스는 자신과 디오티마 사이의 대화의 형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디오티마는 기원전 440년경 아테네로 왔던 이방인으로 역사적 실존 인물로 전해진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그녀로부터 배웠다는 증거는 없다. 그녀는 여기서 단순히 플라톤적 소크라테스를 대변할 뿐이다.

이러한 픽션은 첫째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대한 입장을 유지시켜주고, 둘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대화의 형식을 가능하게 한다.

 

소크라테스 : 에로스는 추하고 나쁜 신인가. 디오티마 : 아름답지 않는 것은 필연적으로 추한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 : 물론 그렇다.

디 : 지혜와 무지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 올바르게 생각은 하지만, 그 생각의 근거를 댈 수 없는 경우 그것은 지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지도 아니다.

소 : 진실되게 말하고 있다. 디 : 에로스도 이와 똑같이 대립된 것 사이에 있는 중간자이다.

소 : 그렇지만 에로스가 위대한 신이라고 모두가 동의한다.

디 : 당신은 신들은 행복하고 아름답다고 주장하는가. 아니면 신들 가운데 어떤 신은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다고 말하고자 하는가.

소 : 제우스께 맹세코 후자를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디 : 당신은 에로스가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욕구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따라서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갖지 못한 자를 어떻게 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소 : 그러면 에로스란 과연 무엇인가. 죽을 존재란 말인가.

디 : 에로스는 죽을 존재와 죽지 않는 존재 사이의 중간자이다.

소 : 중간자란 무엇인가.

디 : 위대한 정령(다이몬)이다. 왜냐하면 모든 정령은 신과 죽을 존재의 중간자이이기 때문이다.

소 : 정령들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가.

디 : 인간의 것을 신에게, 신적인 것을 인간에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사실 신과 인간은 섞이지 않는 법인 데, 정령 덕분에 신들과 인간 사이에 모든 교제와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술에 능통한 사람을 정령적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그 밖의 기술에 정통한 사람은 기술자 또는 장인이라 한다. 이러한 정령의 숫자는 많고 다양한 데, 에로스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에로스의 부모 및 에로스와 철학자의 관계(203a-204c) :

아프로디테의 생일날, 신들은 그녀의 생일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다. 신들의 아들 중에 메티스(Metis: 숙고, 궁리)의 아들인 포로스(Poros: 길, 방도, 대책)도 있었다. 나누어 주는 음식을 먹기 위해 페니아(결핍, 빈궁, 대책이 없음)는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침 포로스는 넥타주에 취해 제우스의 정원에서 잠든다. 페니아는 자신의 무대책성(aporia)를 해결하기 위해, 포로스와 동침하여 에로스를 분만하게 된다. 이와 같은 출신 배경 때문에 에로스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① 어머니를 닮아 언제나 결핍 상태에 있다. 부드러움이나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맨발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닌다. 남의 대문이든 길가든 가리지 않고 땅 바닥에 덮을 것도 없이 누워 잔다.

② 아버지를 닮아 아름답고 좋은 것을 획득하기 계책을 잘 꾸민다. 용감하다. 진취적이고 전력투구를 다하는 빼어난 사냥꾼이다. 끊임없이 계략을 꾸며 현명한 지혜를 얻고 새로운 수단을 개척한다. 그는 평생 동안 지혜를 탐구하면서 산다. 다른 한편 협잡꾼, 마술사, 소피스트이다. 죽을 존재도 죽지 않을 존재도 아니다. 단 하루 동안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가 하며 죽어있기도 한다. 하지만 방법만 찾으면 다시 살아난다. 그는 한 번도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풍족한 상태에 있지도 않다.

따라서 에로스는 지혜와 무지의 중간에 서 있다. 신들 중 어느 누구도 결코 지혜를 탐구하거나, 지혜롭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지혜를 갖고 있는 자는 지혜를 탐구하지 않는다. 또한 무지한 자들도 지혜를 탐구하거나 지혜로운 자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자도 아니고 무지한 자도 아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철학자이다. "그들은 지자와 무지자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고, 에로스도 이들에 속한다."(204a) 지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 수밖에 없고 지혜를 사랑하는 한, 그는 지자와 무지자의 중간자이다.

 

 

2-2. 둘째 마당 제 2막-에로스의 효능

 

에로스는 좋은 것을 영원히 갖고자 하는 동경(204c-206a) :

①'에로스는 인간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디오티마가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한다.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은 무엇인가. 또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마디 대신에 좋은 것이라는 말마디를 대체한다면, 좋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겨나게 되는가. 그 사람은 행복하게 될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좋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하게 되니까 그렇다.

② '이러한 소망과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항상 좋은 것들을 소유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디오티마가 묻고 답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의 특정 종류만을 따로 떼어내서 사랑이라고 하고, 그 이외의 사랑의 종류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창작이라는 말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모든 종류의 없음에서 있음으로 산출하는 행위를 뜻하는 그리스 말 'poiesis'는 시의 산출이라는 특이한 의미로 국한된다.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창작이라 부르지 않고, 하나의 부분 곧, 음악과 운율에 관계되는 부분만 떼어내어 창작이라 부른다. 사랑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장 강하고 격렬한 사랑은 좋은 것들과 행복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돈 버는 일, 몸 가꾸는 일, 지혜를 탐구하는 일(직업적으로 돈을 받고 하는 소피스트들의 지식 행각) 등과 같은 일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은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사랑하는 자라고 할 수 없다. 반면에 좋고 아름다움 것만을 사랑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참다운 사랑이 정의되고 있다. 따라서 일신을 위해 돈벌이를 하고, 몸을 가꾸고, 지식을 파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참다운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을 좋은 것에 따라 잘 가꾸는 것이 사랑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좋은 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항상 소유하기를 사랑한다. 그것도 영원히 소유하기를 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랑이란 좋은 것을 자신 가운데 영원히 갖고자 하는 것이다"(206a.)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 가운데 생산과 출산 활동(206b.1-207a) :

'만약 사랑이 그와 같은 것이라면,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떤 방식의 삶을 영위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행위를 실천해야, 그 노력이 사랑으로 불릴 수 있는가'라는 디오티마의 물음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그러한 행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육체에 있어서나 정신에 있어서나 임신할 수 있어 일정한 나이가 되면, 본성상 생산하고자 한다. 그런데 생산은 추함 속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고, 단지 아름다움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남녀의 결합을 통하여 아이를 낳는 생산 작용은 신적인 것이다. 곧, 곧 임신과 출산은 신적인 것으로서 불사적인 것을 품고 있다. 이런 일은 신적인 것과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조화롭지 못한 것은 추한 것인 반면, 조화로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잉태한 이가 아름다운 것에 접근하게 되면 평온함과 기쁨에 젖어 아기를 생산하지만, 추한 것에 접근하게 되면 침울해지고 슬픔에 빠지고 위축되어 아무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잉태한 것을 오히려 고통스럽게 지니고 다니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남자든 여자든 무엇인가 잉태하여 배가 부른 사람은 아름다움을 강하게 열망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이 그가 분만의 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사랑은 "아름다운 것 속에 생산과 출산이다"(206e).

그런데 왜 생산과 출산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그것은 "(그러한) 생산이 죽을 존재에 있을 수 있는 영원히 … 죽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206e-207a). 따라서 사랑의 대상은 불멸성이다. 이어서 마치 종교에 입문하듯이 '아름다움 자체로의 입문하는 두 가지 방식', 곧 낮은 단계의 입문식과 최종적 단계의 입문식이 거론된다.

 

 

▶생각해 볼 문제

 

1. 플라톤은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참된 것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참다운 사랑은 이러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지, 돈 버는 일·몸 가꾸는 일·지식을 파는 일 등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오늘날 개인의 건강과 신체적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에 주로 국한되는 웰빙(Well-Being)이 과연 참다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 플라톤은 남녀의 결합을 통해 아이를 낳는 생산 활동은 신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남녀의 결합은 아이를 낳기 위한 목적에서 신성하게 행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낳을 목적이 아닌 남녀의 결합을 우리는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고전 읽으면 논술이 술술 <7-4> 플라톤 '향연'

 

둘째마당 3막과 셋째마당-아름다움으로의 입문식

 

▶주요 의제

① 죽을 존재의 불멸성에 대한 갈구 및 그 형태

② 아름다움 자체로의 직관 과정 및 아름다움 자체

③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 에로스의 화신인 소크라테스

④ 에필로그: 디오니시오스에서 아폴로로

 

▶ 핵심용어

▶교육과 사랑의 단계(scala amoris) = '향연'에 따르면 교육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와 같은 시인이나 발명가를 양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리쿠르고스와 솔론 등과 같이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의 최종 목표는 아름다움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피교육자는 ①먼저 개별적인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러한 아름다움이 다른 육체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인도된다. 그래야 개별 육체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②이어서 아름다운 심성을 아름다운 육체보다 더 사랑하게 되도록 인도되어야 한다. 그는 이제 아름다운 도덕적 행위나 법이나 제도를 육체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

③이어서 아름다운 학문을 사랑하도록 인도된다. 이때 학문은 기하학이나 수학이 모델이다. 내각의 합이 180도인 정삼각형은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성 가운데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의 규준이 된다. 플라톤은 지성적으로만 알 수 있는 만물의 규준들을 이데아들이라 부른다. 이런 이데아를 통해 피교육자는 아름다움의 바다인 철학으로 향하게 된다.

④이제 피교육자는 갑자기 무엇인가에 압도돼 이데아들의 이데아인 아름다움 자체를 보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인생을 살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단계는 '국가론'의 동굴의 비유에서도 유사하게 되풀이 되고 있다. 그리고 후에 플로티노스의 철학 체계의 골격인 물질→영혼→정신→일자로의 상승의 길과 일자→정신→영혼→물질로의 하강의 길의 초석이 된다.

 

 

플라톤은 아름다운 육체를 단서로 하여 아름다움 자체로 나아가고 있다.

 

 

1. 둘째 마당 제 3막

 

플라톤은 철학적 깨달음의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종교적 입문 단계를 원용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대개 미스테리온(mysterion) 또는 텔레우테(teleute)라는 보통 명사로 종교 의식을 나타낸다.

하지만 보다 높은 단계의 예비 단계, 곧 초보적 단계로의 입문을 미에시스(Myesis)라 부르고, 보다 높은 비밀 의식의 단계, 곧 궁극적 단계로의 입문을 에포테이아epoteia(epi옆에서+ opteia바라보다)라 부른다. 여기서 불멸에 대한 디오티마의 첫 번째 논의가 myesis에 해당한다면, 이어지는 아름다움 자체로의 상승에 대한 디오티마의 두 번째 논의는 epoteia에 해당한다.

 

가. 낮은 단계의 입문식

 

죽을 존재의 불멸성에 대한 갈구 및 불멸성의 형태(207a-209e) : 사랑과 욕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불멸성에 대한 갈구이다. 모든 동물은 서로 결합하려는 사랑의 병과 새끼를 양육하려는 사랑의 병에 걸려 있다. 왜 그런가. "죽을 존재의 본성은 가능한 한, 영원히 살고자 노력하기"때문이다. 죽을 존재는 낡은 존재 대신, 그것과 다른 새로운 존재를 남겨 놓는 방식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누구든지 평생 동일한 사람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죽을 존재는 완벽하게 동일한 존재로 머무는 신적 존재와는 달리 늙게 되면 소멸하는 대신, 자신과 같은 새로운 존재를 남겨 놓는 방식으로 불멸성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불멸성은 신적인 것, 곧 영원한 형상과의 접촉직관을 통한 불멸성이 아니라, 종의 지속이다. 또한 명예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영속하는 명성에 따른 불멸성을 얻고자 가능한 한, 훌륭한 일을 하고자 한다.

 

불멸성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육체적으로 생산력이 충만한 사람은 출산을 통해 불멸성과 기억 그리고 행복을 확보하려는 반면 영혼에 있어서 생산력이 충만한 사람들은 영혼이 생산해내기에 적합한 사려 깊음과 그 밖의 탁월함을 육체 속에서가 아니라, 영혼 가운데 생산한다. 시인과 발명가라 불릴 수 있는 장인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가와 가정의 기초를 질서짓고자 사유를 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하다. 이러한 사유를 사려 깊음과 올바름이라 한다. 이들은 신적 영혼을 타고난 탓에 영혼에 있어 생산력이 충만한 사람이다. 이들은 성인이 되면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산출하기를 열망한다. 이들은 아름다움의 주변에 맴돈다. 그는 추한 것 가운데 아무것도 생산하고자 않는다. 그리고 만약 그가 훌륭하고 착한 영혼을 만나면, 그의 육체와 정신 모두를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 덕에 대해, 사람이 평생 추구해야 할 일에 대해 풍부하게 이야기해준다. 그 까닭은 아름다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오래 전부터 잉태해왔던 것을 생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인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를 보라. 그리고 라케다이몬의 구원자인 리쿠르고스가 남겼던 후손(법과 관습)을 보라. 또한 솔론이 남겼던 법들을 보라. 이들은 "모든 종류의 탁월성을 산출하기" 때문에 불멸의 명성을 얻는다. 이어서 디오티마는 더 높은 신비 의식으로 소크라테스를 이끌고 있다.

 

나. 높은 단계의 입문식: 아름다움 자체로의 상승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직관의 과정:(209e-212c) : 디오티마는 낮은 단계의 입문식이 근거하고 있는 최종적이고 가장 높은 신비 의식의 경지에 대해 조심스레 말문을 연다. 나이 많은 사람의 개인 지도를 받는 소년에 해당하는 입문자가 거쳐야할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직관 단계는,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의 상승 → 아름다운 실천 → 아름다운 학문 또는 지식 → 아름다움 자체이다. 이 단계는 아름다움이 증가하는 방향인 동시에 보편성이 증가하는 방향이다. 이 단계들을 보다 상세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①하나의 육체의 아름다움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의 상승: 입문자는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육체들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인도자는 그가 첫째,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만을 사랑하고 또한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대화(logoi)를 꽃피우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정서적인 것과 지성적인 두 가지 요소 중 정서적인 것이 먼저 나온다. 지성적 대화는 소년으로 하여금 보다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생각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다. 둘째, "이런 저런 육체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움은 다른 육체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움과 형제 사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여기서는 지성적인 부분이 정서적인 부분보다 먼저 나온다. 입문자는 모든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이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만약 입문자가 이를 깨우치게 되면, 그는 모든 아름다운 육체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의 육체만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을 멀리 하게 된다. ②아름다운 실천: 입문자는 "육체들 속에 깃든 아름다움보다는 영혼들 가운데 깃든 아름다움을 훨씬 더 고귀하게 여겨야 한다." 인도자는 젊은이가 영혼 가운데 약간의 아름다움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그를 더 낫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로써 입문자는 "한 평생 추구해야 하는 실천적인 일과 법 가운데 깃들어 있는 아름다운 것을 직관하고, 모든 아름다운 것이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과 같은 종류라는 것을 보고서, 육체적 아름다움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는 데로 인도될 것이다. ③아름다운 학문 또는 지식: 입문자는 한평생 전념해야 하는 실천적인 것으로부터 인식들로 인도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의 더 넓은 대양으로 향하여 아름다움을 명상하면서, 지혜에 대한 끝없는 사랑 가운데서 아름답고 장엄한 이야기들과 사상들이 산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하다." 이 지점에서 입문자는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지혜에 대한 사랑인 철학의 상태에 도달한다. 철학은 보편성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입문자는 이러한 단계를 거치면서 유일한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인식을 직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④ 아름다움 자체: 여태까지의 과정을 성실히 밟아왔다면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경이로운 것을 갑작스레 얻어 만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 자체(211a-212c): 입문자가 경험한 아름다움 자체는

㉠생성·소멸·증가·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아름답고 어떤 점에서 추한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아름답고 또 어떤 때는 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는 아름답고,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는 추한 것이 아니다.

㉤ 이곳에서는 아름답고 저곳에서 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다른 사람에게는 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름다움 자체는

㉠사람의 얼굴이나 손 또는 신체의 어떤 부분과 같은 형상에서도 또한 어떤 언설이나 인식으로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개별적인 생명체나 땅에서나 하늘에 또는 그 밖의 다른 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에 있어 그리고 그 자체에 대하여 또한 그 자체에 따라 단일한 형상으로서 항상 존재하는 것인 반면, 그 밖의 모든 생성 소멸하는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방식으로 아름다움 자체에 참여한다.

 

디오티마에 따르면 그러한 세계는 아름다움 자체를 직관하는 사람이 사는 세계이다.

만약 당신이 언젠가 아름다움 자체를 본다면,

①이 아름다움 자체를 값나가는 재산, 아름다운 옷, 아름다운 소년이나 젊은이와 비교하지 않을 것이다.

②젊은 연인들을 보기 위해 그리고 그들과 항상 하나가 되기 위해, 가능하면 그들과 식사나 술을 같이 먹고 마시려하기보다는 오직 그들의 아름다움만을 관조하고자 함께 할 것이다.

 

이어서 디오티마는 순수하고 아무것과 섞이지 않은 단일성 가운데 있는 신적인 아름다움 자체를 직관하게 되어 그것과 함께 있으려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①그런 사람의 삶을 비천한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②그는 허상과 접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와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탁월성의 모사품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산출하는 사람이 아닌가.

③참된 탁월성을 낳는 사람과 그것을 돌보는 사람이 신들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④ "이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 불사적인 사람이 있다면, 방금 말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2. 셋째 마당

 

에로스의 화신인 소크라테스 :

알카비아데스의 이야기(212c-222b): 술취한 알키비아데스가 갑자기 잔치 자리에 등장해 소크라테스과 아가톤 사이에 자리잡고 앉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소크라테스는 실레노스의 조각상과 같다. 이 조각상을 쪼개보면 그 안에 조그마한 신상이 들어있듯, 소크라테스는 겉모양과 달리 내면에 신비 의식의 입문자들만 알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다. 그는 겉으로는 추하고 항상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의 내면은 신적 덕과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연마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언제나 의미 있는 이야기만 한다. 계속하여 그는 포티데아 전투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예를 들면서, 그의 용감성과 참을성에 대해 찬사를 한다.

 

2) 에필로그: 디오니시오스에서 아폴로로(221c-222d):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단순히 그와 아가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 사이에 부수적인 이야기들이 오갈 때, 또 다른 술 취한 무리들이 들이닥쳐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게 된다. 일부는 연회장을 떠나가고 알키비아데스도 잠이 든다. 새벽녘에 그가 깨어났을 때, 소크라테스와 아가톤 그리고 아리스토파테스만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큰 술잔을 돌리며 소크라테스는 두 사람에게 훌륭한 비극 작가는 희극을 쓸 수 있고, 그 역도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희극과 비극의 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참다운 인식, 곧 아름다움 자체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졸고 있다. 이리하여 모두는 죽음을 상징하는 잠에 빠져든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일어나 아가톤의 집을 떠나 평소와 같이 리케이온(아폴로의 별칭)으로 가서 세수하고 여느 날과 똑 같이 하루를 보내고 난 다음, 저녁이 되자 집에 돌아가 쉬었다. 이리하여 '향연'은 젊은 신 디오니시오스 축제로부터 시작되어 이성적인 아폴로 신에서 막을 내린다. 디오니시오스는 에로스의 생성지라면, 아폴로는 에로스가 향해 가야 할 목적 지점으로 설정되고 있다. 억견에서 시작하여 참된 인식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생각해볼 문제

 

① 아가페는 신적 사랑에 바탕을 두고 대가성 없이 남을 사랑하는 것인 반면, 참된 것에 대한 지성적 가치 평가에 바탕을 두는 것이 에로스이다.

전자에서는 감사와 고마움이라는 정서가, 후자에서는 좋은 것에 대한 지성적 평가가 강조된다. 사랑에는 정서가 전부일 수는 없다. 지성적 판단이 첨부되어야 한다. 따라서 에로스는 힘겹게 올라가야 하는 상승의 길이라면, 아가페는 올라가야 비로소 내려올 수 있는 하강의 길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판단 능력도 없이 모든 것을 대가성 없이 사랑한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를 사례를 들어 생각해보라.

 

②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경험을 교육 목표로 삼고 있는 플라톤의 생각에 입각하여, 오늘날의 실용적 지식 위주의 교육의 문제점을 말해보라.

 

 

이부현 교수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장

 

/ 국제신문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