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청미래

https://dia-na.tistory.com 2010. 1. 12. 20:24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1969년 스위스 취리히 태어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런던에 살고 있다.

 

작년 가을에 <불안> 이라는 책을 읽고 그에게 반해 방학 즈음에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여행의 기술>을 주문했다.  학교 도서관에는 그의 다른 책 <일의 기쁨과 슬픔> 또한 주문해 놓아 이리 저리 둘러봐도 '보통'으로 둘러싸인 겨울을 나고 있는 셈이다.

(초딩 딸아이는 '보통' 이라는 이름에 연신 깔깔 거린다. 어느 나라 사람일 것 같냐고 물으니 프랑스 같댄다. 정답은 스위스라고 하니, '아, 스위스는 3개국어를 쓰지~' 한다. 스위스 태생이지만 이름에서 프랑스풍이 느껴지는  것은 딸아이의 대답과 같은 이유때문일게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업무상 파리에 갔다가 런던으로 돌아오는 남녀가 우연히 비행기 옆좌석에 앉아 말을 나누면서 사랑으로 번져간 이야기를 다뤘다.

 

23살 그래픽 디자이너 여성(클로이)과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나'는 이내 사랑에 빠져들고 사랑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겪게 되는 통속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배열하고 의미를 부여해 통속 소설을 뛰어넘는다.

 

지속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클로이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안 믿는다고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그게 반드시 사람들의 진실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방식일 뿐이거든요. 사람들도 사랑을 믿지만, 그렇게 믿어도 되는 상황이 오기 전에는 아닌 척하죠. 가능하기만 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냉소주의를 던져버릴 거예요. 하지만 다수는 그럴 기회를 결코 얻지 못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의 지속성을 믿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 아닐까.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윗글은 '마르크스주의'라는 부제속에 달린 글이다.

이 책 속의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그 붉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미국 태생의 희극인 마르크스 (Grucho Marx. 1890~1977 )를 지칭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는데 보통은 이 농담이 클럽 회원권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붉은 마르크스가 아닌 미쿡의 마르크스주의는 사랑을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기를 갈망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꿈이 공상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나 자신을 더 낫게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우습게 생각할 때에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최대로 존중하게 된다.

 

지속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클로이는 '나'의 동료인 '윌'을 만나면서 '내'곁을 떠나간다.

쿨 하게 그녀를 보낸 '나'는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덕은 커진다는 예수콤플렉스로 실연의 고통을 극복하고 또다른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의 글에 빠져드는 것은 일상에 가려진 삶의 혜안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스탕달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사랑때문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고 말한다.

 

인간의 역사와 같이 호흡해왔을 '사랑'이란 감정 또한 자본주의의 의도적인 산물임을 신랄하게 보여주기 위해 S.M.그린필드의 『소셜로지컬 쿼터리 Sociological Quarterly』에 실린 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달리 부여할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동기를 부여하여 개인들이 남편-아버지와 아내-어머니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핵가족을 구성하도록 유도한다.

핵가족은 재상산과 사회화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상품과 용역을 분배하고 소비하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사회체제를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이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지겹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그래, 사랑이란 감정을 극도로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게 된 데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큰 힘을 발휘했다치자. 그렇다고 해도,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인간의 불완전성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의 시선을 받아야만 존재의 이유를 알고

누군가로 부터 이해를 받아야만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나를 이해해주고 바라봐 줄 거라고 믿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책속의 '나'는 똑같은 고통의 산이 기다릴 줄 알면서도 새로운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