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수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와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

https://dia-na.tistory.com 2009. 2. 23. 18:43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

6년간-아니 7년째네- 장수한 프로그램이라는데, EBS 라디오 하면 '영어 듣기 능력 평가' 방송밖에 떠오르지 않는  이 채널을 찾아 다닌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새해의 한 각오로 영어 공부를 시작해보겠다고 하며 주방 라디오 채널을 온 종일 104.5에 맞춰 놓다 보니 자연스레 아침 9시에 시작하는 한영애씨의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다.

 

뭐 모든 방송프로그램이 그렇듯이 요일별 편성이 색다르고 초대 손님이 있고 공연 선물을 주고... 비슷 비슷한 fm 프로그램이겠거니 했는데, 한영애씨와 초대손님을 통해 만나는 가객, 문객들의 품격이 남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1월이 지날 무렵 간신히 붙들고 있던 '귀가 트이는 영어'를 팽개치고 그나마 붙들고 있던 프로그램은 <문화 한페이지>였다.

그러던게...

참나. 영어 교육 강화와 상업성이 맞물린 봄 편성 덕분에 이 프로그램이 폐지된댄다.

온라인에서 폐지 반대운동이 벌어지고 1인시위가 이어져 꽤 많은 매스콤에서 폐지 반대론을 지지했건만, 지난주로 이 프로그램의 폐지안이 확정된 듯 하다.

 

돈과 영어에 미친 나라. 아니지... 그냥 돈에 미친나라지. 돈이 안된다면 영어에 미치지도 않았겠지.

 

<한영애의 문화 한페이지> 의 요일별 코너를 모두 좋아했던 나로선 애석하기 그지 없다.

침통한 마음으로 지난 주 방송을 듣던 중 목요일 <문학> 코너를 담당한 소설가 원재훈씨가 소개한 이승수의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란 책이 가슴에 닿아 바로 주문해 읽게 되었다.

 

책날개에 소개된 이승수의 이력은 이러하다.

경기도 광주사람으로 ... 문학을 중심으로 역사와 지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옛이갸기를 듣고,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을 한다.

 

책 내용 또한 소개된 글처럼 역사와 지리를 구비구비 돌며 부드럽게 이어져있다.

내가 굳이 이책을 사게 된 것은 '해학'이란 꼭지글 때문이었다.-물론 이 부분은 라디오에서 원재훈씨와 한영애씨가 낭독해주었다.

 

북경에 갔던 문사가 하루는 수레를 타고 가는 미인을 보았다.

문에 기대 넋을 놓고 바라보던 그는 문득 필묵을 찾아 두 구절 시를 적어 보냈다.

 

" 마음은 미인을 따라 나서고

 몸만 덩그러니 문에 기댔네 "

 

그 미인은 수레를 세우고는 그 자리에서 답시를 지어주었다.

 

"수레 무겁다 나귀 성을 내더니

 한 사람 넋이 더 탔던 거군요."

(유몽인 <어우야담>)

 

이 구절을 찾기 위해 책이 배달되자 마자 만사 제쳐넣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 책은 이처럼 책속에 거론된 많은 책들을 금새 다 사고싶게 만드는 맛있는 책 메뉴판같다.

 

책을 다 읽어나갈 무렵,

저자가 쓴 글 한부분에서 소설가 원재훈씨가 굳이 이 책을 소개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세상엔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참 많다.

앞에 달리는 자동차의 창밖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는 손이 나를 슬프게 한다.

자정 넘어 학원 버스에서 내리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나를 슬프게 한다.

영양실조에 걸려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국 아이들의 눈망울이 나를 슬프게 하고,

해외로 입양되어가는 아기의 천진한 표정도 나를 슬프게 한다.

표절과 무식과 폭력이 예쁜 옷을 입고 뽐내는 세태가 나를 슬프게 한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그 말에 담긴 끔찍한 비극을 뻔히 알면서도 오로지 자기 권력과 이익을 위해 좌익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들을 교묘하게 내뱉는 사람들이다.

이보다 더 나를 슬프게 하는 건,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그 말들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의 천진함이다.

 

그래서...

이 책을 덮는 순간에 나도 저자의 슬픔에 젖어 들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어쩔 수 없이 쓸려보내는 순간을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는

혹은 같이 휩쓸려가고 있는 무수한 모래알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희망을 길어올리며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역시 문학이, 삶이 주는 이런 힘 때문일게다.

 

모래알 하나로 / 김남주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첫술에 배루르랴 하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없어라 많지 않아라

모래알 하나로 적의 성벽에

입히는 상처 그런일 작은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는사람은.

 

<한 영애의 문화 한페이지> 폐지 반대 1인 시위를 이어간 사람들을의 소식을 접하며

내내 이 시 한편이 귓가를 맴돌았다.

아직도 희망을 길어올리는 사람들 덕분에

그들의 희생때문에

거슬러올라가는 역사가 바로 서는 게 아닐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