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https://dia-na.tistory.com 2013. 7. 4. 18:25

신사모에서 강추해서 읽은 책

 

 

한나 아렌트가 아니고

우리나라 88만세대가 겪는 비정규직의 실생활이라고 하기에

저자가 경험한 노동은 너무도 참혹하다.

 

오랫만에

<불편해도 괜찮아>를 집었다가

이미 끝까지 읽은 책이었음을 알고 당혹해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후기를 옮기기로 한다.

 

이하 발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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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틀발이-진도, 꽃게잡이

그래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배가 무게가 있고 길이가 있어서 쉽게 안 뒤집힌다. 근데 초짜 선장들이 검먹고 도망갈라꼬 배 돌리다 배 옆구리에 파도 맞으면 고대로 넘어가는기라.” 윤철형님

 

힘 안들이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잇는 요령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깨달았다. - 문어를 떼어내며

 

항구에서는 모든 사람의 삶이 하향 평준화된 사회가 주는 만족감이 있었다. 모두가 헌 추리닝을 입고 형편없는 식사를 하고 매일같이 위험하고 힘들게 일했다. 볼품없는 외모를 주눅 들게 만드는 예쁜 여자도 없었다. 누구도 그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거기엔 실패를 받아들인 데서 오는 편안함도 있었던 것 같다. 항구에선 더 이상 내 인생이 아무 문제없는 척할 필요가 없었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약속할 필요도 없었고 왜 나는 친구들 같지 못한가 자책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계발서가 권하는 어설픈 거짓말로 자신을 속일 필요도 없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었고 나는 그 밑바닥에 있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놀랍게도 항구에선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까지 살았던 집은 전주에서도 아주 못살던 동네였다. 그곳에선 집집마다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고 한밤중엔 원색적인 욕지거리가 난무하는 부부싸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평화롭게 기억하고 있다. ‘삶의 하향평준화가 가져다 준 만족감’. 주위를 둘러봐도 딱히 잘난 이가 없었기에 다들 큰 소리치고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책을 읽으며 그 시절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2. 빈민의 호텔- 서울, 편의점과 주유소

누군가 파리와 런던을 이렇게 비교한 적이 있다.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지만 런던은 영국이다.’ 런던의 예는 서울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모든 것이 서울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은 서울에만 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한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바로 서울이다.

지방에서 청소년의 가출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청소년들이 집을 나서서 돈을 벌 수 있는 거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주유소든 편의점이든 알바 자리는 지방 소재 대학생들이 차지하고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서울의 청소년들의 일탈행위는 더 광범위하고 일상적인 것 같다.

 

어리석게도 나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싸울 의지가 없는 동물일수록 더 크고 위협적으로 짖는다고 한다. - 고시원에서 연두팬티와 싸우며

 

감정 노동의 또 다른 불쾌한 특징은 사회가 감정 노동자들의 고통을 너무 가볍게 본다는 것이다. ...

평생을 손님으로만 살아온 사람들은 손님을 상대하면서 느끼는 좌절감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 회사는 이러한 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편의점 알바는 쉬운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3. 과자의 집의 기록- 아산, 돼지 농장

조롱을 감수하면서 마지 않는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보깅네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내가 경멸하는 사람은 황소 심줄 같은 끈기를 지닌 사람들이다. 참고 참아서 끝내는 어디선가 한자리 꿰차는 사람들. 그러니 너희들도 인생의 절반을 무의미한 일을 하며 살라고 권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중도 포기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라 해야겠다. 참을성 좋은 사람들은 체면이니, 부모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분에 충성을 다하는데,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건 여지없이 이런 부류다.

4. 면죄부 춘천, 비닐하우스

제대로 된 여가를 즐길 수 없을 땐 값싸고 자극적인 먹을거리에 매달리게 된다. 양돈장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끝나면 한 시간씩 걸어 과자나 빵을 사다 먹었다.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은 입 안에서 달고 기름지고 톡 쏘는 맛들이 느껴질 때뿐이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내 경제 상황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사치 중 하나였다. 양돈장에서 내 일당이 35000원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마저도 낭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돼지 농장에선 미래라는 것이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길거리 음식이 점점 더 달고 매콤하게 변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나는 IMF 직후 무지 매운 열라면을 이웃의 권유로 한번 먹게 되었는데 너무 매워서 한입 밖에 삼키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열라면을 좋아했던 그녀는 신학대 출신 남편과 결혼해 교회에서 전도사에게 주는 한달 60여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으므로 제대로 된 여가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극장나들이조차도.

 

마을 사람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돈만 밝히고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한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젊은 사람들이 피하는 일이란 어떤 사람이라도 꺼릴 만한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누군가는 최악의 생활환경에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일하는 게 문제 될 게 없다는 사고방식 말이다. 그런 생각은 엄하게 훈육받은 아이들이 장래에 성공한다는 믿음만큼이나 헛소리다.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한단 말인가? 왜 누군가는 항상 고통 받으며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어째서 가장 영향력 없는 사람들만이 이 엉망친창인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5. T.G.I.F- 당진, 자동차 부품공장

여자들의 강함은 믿는 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뭐가 됐든 한가지씩 고집스럽게 또 절실하게 믿었다. 예수든 부처든 아들이든 딸이든 남편이든. 아들딸을 믿는 쪽이 절대 다수였고 남편을 믿는 사람은 희귀했다.

 

→ 아들 종교를 가지고 계신 울 시어머니 생각남.

 

  짧은 감상평.

감성이 메말랐는지 눈물이 난다거나 주인공에게 감정이 이입된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가 가진 삶의 통찰력은 나를 반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마다 보통 사람보다 무능한 것에 대해선 읽는 내내 화가 치밀기도 했다. ‘퀴닝이란 멋진 말을 알게 된 것이 소득.